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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내 몸 같은 바지 / 이오덕 '두껍고 푹신한 마음을'


  


   10년쯤 전에
   광화문 땅밑
   교보문고로 들어가는 길에서
   사 입은
   누런 골덴바지,
   그게 몇 해 전부터
   무릎 쪽이 헤지고 엉덩이가
   빵꾸날 지경이라
   더 입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어
   그대로 두었는데
   서리가 하얗게 내린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라
   마침 그날 찾아온
   서울 ** 동 어느 골목에서
   삯바느질하는 고호자 씨한테
   부탁을 했다.

   이 바지 좀 꿰매 주실 수 있을까요?
   이 뒤쪽과 두 무릎 안쪽에
   좀 큼직하고 두꺼운 천을 대어서
   누벼 주시면 좋겠는데요,
   더구나 무릎은 몇 해 전부너
   늘 찬바람이 일어날 지경이니
   푹신한 걸로 대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고씨가 보더니 그렇게 하겠다면서 가져가더니
   일 주일 뒤 꿰맨 바지를 가져왔다.
   날씨가 추운데
   빨리 입으셔야지 싶어서요 하면서.

   그걸 입어 보니 와아, 
   무플이 후끈후끈
   앉아 보니 엉덩이가 푹신푹신
   이렇게 좋을 수가!
   이렇게 좋은 바지는 정말이지
   내 평생 처음이다.

   나는 고씨의 그 꼼꼼스럽고 정성들인
   바느질 솜씨가 너무 고맙고,
   쓰레기로 버릴 수밖에 없는 바지를
   이렇게 소중히 잘 기워서 가져온
   그 마음이 놀랍고 반가워서 
  
   앞으로 나도 죽는 날까지
   이 바지를 입으면서
   이 바지처럼 살기로 작정했다.
   비록 내 몸은 다 늙고 헐어 못 쓰게 되더라도
   나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쓸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모든 이웃들에게
   두껍고 푹신한 마음을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평생 처음 입어 보는
   내 몸 같은 그 좋은 바지를 입으면서. 

   - 이오덕 시집, <고든박골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