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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은유의 책편지 - 분노와 애정

“산후통에 우울증까지 와서 힘든 시간이었어요. (…) 저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어요. 시도때도 없이 눈물나고, 몸도 마음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고요.” 생후 50일 된 아기 사진과 함께 당신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소식 전해주어 고마워요. 아기는 예쁘고 당신은 아프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반은 웃고 반은 울고 태극 문양처럼 둘로 나뉘었어요. 붙여 쓴 네 번의 ‘너무’가 꼭 길게 늘어진 비명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안쓰러운 마음에 ‘어서 만나 수다 떨자’는 답장을 부랴부랴 보냈는데요, 얼굴 보기 전에 급한 대로 당신과 사려깊은 대화를 나누어줄 위로의 사절단을 파견하려 해요. 에이드리언 리치, 어슐러 르 귄 등 여성 작가 16명인데, 그들이 엄마됨에 관해 쓴 글을 모은 <분노와 애정>이란 책이에요. 엄마들이 쓴 육아회고록 제목에 ‘분노’라는 단어가 딱 들어간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들었어요, 저는.

 

내용도 정확해서 급진적이에요. “아이를 낳고 무엇을 배웠나요? 나는 말하지 못하는 게 어떤 건지를 배웠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 무언가 심오한 것.” 출산 후 엄마가 되면 생명의 신비함도 느끼지만 ‘말에 대한 갈증’도 크잖아요. 일전에 제 수업에 온 돌쟁이 엄마 학인의 말이 떠올랐어요. 아이랑 둘이만 있다가 오랜만에 ‘어른들의 대화’를 들으니까 참 좋다고요. 자기 자신의 본질에 집중하게 하는 이야기를, 의식을 고양시키는 대화를 당신도 간절히 바라고 있겠죠.

 

그런 마음이 드는 건 모성애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모성애라며 제인 라자르는 이렇게 말해요. “애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애는 내 삶을 망가뜨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우리가 양가성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바로 모성애가 아닐까.”

 

와, 저는 감탄과 동시에 질투를 느꼈어요. 나도 충분히 느낀 건데, 왜 나는 내 느낌과 감정을 존중하지 못했을까. 감히 언어화하지 못했을까. 초보 엄마 시절 ‘육아서’를 제가 좀 열심히 봤거든요. 거기선 주로 ‘아이에게 화를 내면 정서 발달에 해롭다’ 같은 아이 입장에서 엄마됨을 논했어요. “잠을 자지 못하면 제정신이 아닌, 비참하고 화난 여자가 된다.” “가끔 내가 작고 죄 없는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감정에서 이기적이고 속 좁은 괴물을 본다.” 같은 엄마 입장에서 표현한 극사실주의 문장은 거의 나오지 않았죠. 언어가 없으니 감정이 지워진 거예요.

 

그래서 <분노와 애정>을 당신이 베개로 삼았으면 좋겠어요. 제왕절개한 부위에 덧이 나고 유선염에 걸렸는데도 ‘모유’를 먹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눈물과 젖을 동시에 쏟아가며 수유했다는 당신에게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네 몸이 우선이야’라고 인생 언니들이 입을 모아 말해주니까요.

 

제 짐작인데요. 당신이 첫 책을 내고 이제 막 작가로서 글 쓰고 세상과 교감하는 기쁨을 알다가 엄마가 됐기에 더 힘들 것 같아요. 남들은 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고, 아이와 유배된 채 자투리 시간만 허락되는 현실에 조바심이 날 듯해요. 저도 애들만 아니면 제가 대하소설이라도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완벽하게 통제된 일상’은 불가능하더라고요. 누구나 한계 속에서 써요. 그래야 한계에 갇힌 인간의 삶을 위로하겠죠.

 

또 다르게 생각하면 “잠깐의 깨달음만이 허락되며, 이것마저 방해받지 않는 짧은 틈을 타 빨리 기록해야” 한다는 점에서 ‘레지스탕스의 일기’라고 부르는 엄마의 글쓰기는 당신만의 고유하고 매력적인 작업이 될 거예요. 돌봄의 시간들, 그 분명함의 경험들을 하나씩 기록해봐요. 자기 감정을 신뢰하고 끝까지 써내는 사람이 작가라는 것. 이 멋진 선배 엄마들이 증명합니다.

우선은 산후통과 우울증을 잘 치료해야죠. 좋은 엄마 말고 쓰는 엄마로 살아가라고, 당신의 작은 아기도, 에이드리언 리치의 첫째아이처럼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엄마는 늘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한시도 빠짐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관계란 없어요.”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072207035&code=960205#csidx2176b09969015398d64b3cff10d402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