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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은유의 책편지 - 소금꽃나무

‘저는 그동안 마치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된 것처럼 타인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 인생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았습니다. 불우하고 불행했던 어린시절 엄마에게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애썼고, 가난을 벗어나고부터는 착한 사람, 유능한 교사를 연기하며 자신을 억눌렀습니다.’

 

캐릭터 편지지에 쓴 손글씨가 반가웠습니다. 귀여운 형식에는 쓸쓸한, 그런데 단단한 씨앗 같은 직시의 말이 담겼고요. 속사정을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남이 보는 나에 ‘연연하는 삶’은 ‘연기하는 글’을 낳곤 하죠. 그런 글엔 직업이나 가족관계 같은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어요. 퍼즐 한조각 빠진 것처럼요. 그건 글쓴이가 실수로 빠뜨린 게 아니라 일부러 넣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요. 안 쓴 것이 아니라 못 쓴 거였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기억납니다. 수업시간에 제가 ‘동료들 이야기를 쓰면서 왜 직업을 명시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기간제 교사인 걸 밝히고 싶지 않았다’고 작게 말했습니다. 임용고사에 번번이 떨어진 게 자기가 무능한 탓 같아서 창피하다고 더 작게 말했습니다. 저는 꼭 그렇지 않다고, 그런 생각을 왜 어떤 계기로 하게 됐는지 글로 써보라고 했고요. 당신이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어 자기 이해에 이르길 바라면서요. 그 말이 당신에게 힘이 됐다니 기쁩니다. “기간제 교사라는 사실이 흉터가 아니라 제 상태와 다짐을 드러내기 좋은 글감이 되었다”는 씩씩한 문장에 안도했습니다.

 

혹시 글이 생각대로 써지지 않아 낙담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글쓰기는 경험의 재해석 작업인데요. 의지보다 기술의 영역이기에 생각을 연마할 연장이 필요하답니다. 내면의 낡은 생각(기간제 교사는 무능하다)을 부수고 새로운 사유(수업을 차질없이 진행하는데도 기간제 교사는 왜 무능하게 생각될까)를 만들어나가는 도구, 이걸 니체는 ‘망치’라고 했고 카프카는 ‘도끼’라고 했습니다.

 

<소금꽃 나무>도 당신에게 좋은 연장이 될 듯해요. 노동자가 쓴 노동자 이야긴데요, 표지를 넘기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구에게든 삶이 있듯 내 삶은 그랬던 것뿐이다.’ 저는 이 암호 같은 문장을 길잡이 삼아 본문을 읽었어요.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조건들인 가난과 불우와 불행과 부조리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 책장을 덮고 나면, 자기가 겪은 일들을 겪었다고 말하는 일의 힘과 아름다움이 끼쳐옵니다. 저자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요. 그 역시 당신처럼 자기 처지를 부정하다가 <전태일 평전>이라는 책을 연장 삼아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고 “다시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말자는 약속”을 지키는 데 삶을 겁니다. 글 쓰는 노동운동가가 되죠. 본문에는 교사를 대상으로 한 연설문도 실렸거든요.

 

“육아휴직 중이던 선생님의 자리에서 아이들 곁에 머물렀던 기간제 선생님이 그 자리를 떠날 때 어떤 마음일까 헤아리는 일. 급식소에서 온종일 물에 질척거리며 무거운 자루를 옮기고 불가마에서 찜질하는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점심에 아이들이 숭고함을 갖게 하는 일. 핏발 선 눈으로 아침에 학교를 나서는 경비 아저씨들의 외롭고 긴장되던 밤을 아이들이 기억하게 하는 일”을 저자는 전교조 교사들에게 당부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하는 말들. 당신의 마음을 헤아린 듯한 이 부분을 읽어주고 싶었어요. 과거엔 생산직과 사무직을 나누었다면 지금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힘 있는 자들은 노동자 간의 위계 구조를 짜놓고 불합리한 노동 현실을 유지하죠.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는 건 혼자의 노력으로는 어렵겠죠. “정규직이 하던 일을 하면서 절반도 안 되는 첫 월급을 받”는 동료가 있음을 문제 삼고, 타인의 노동으로 자신의 노동이 굴러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적어도 당신이 기간제 교사라는 말을 ‘존재 부정의 낙인’으로 느끼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에 나오는 열사니 투쟁이니 하는 단어가 생경할 수 있지만 <전태일 평전>부터 <소금꽃 나무>까지 동서고금 막론하고 ‘좋은 연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에요. 사람을 종이컵처럼 쓰고 버리면서도 노동자 스스로 자책하게 만드는 세상에 지지 않고 목소리를 냅니다. “나도 인간이에요.”

 

경향신문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111450001&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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