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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은유의 책편지 - 아침의 피아노

초여름 장마답게 그날은 종일 비가 내렸지. 창밖엔 밤비가 속살거린다고 노래한 윤동주의 밤, 나는 시인처럼 등불을 밝히지는 않고 어둠을 끌어안고 누워 있었어. 투명 이어폰을 낀 것처럼 뜻 없는 빗소리에 귀를 대고 가만히. 눈떠 보니 새벽 5시네. J도 깨어 있을까. 그대는 가끔 이 시간에 SNS에 짧은 글이나 밀린 사진을 올리곤 했지. ‘벌써 일어남?’ 문자를 보내면 ‘아직 안 잤다’거나 ‘22시간째 깨어 있다’ 했어. 원고 쓰느라 밤을 새우곤 하는 그대의 체력이 부러웠어. 한 줄도 쉽게 쓰지 않는 사람이라서 좋았지.

 

그대가 툭 말했어. 건강검진을 했는데 유방암 소견이 나왔다고. 나는 많이 놀랐네. 울지는 않았어. 책에 길들여진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책부터 찾지. 기쁠 때는 놀고 슬플 때는 읽지. <아침의 피아노>에 손이 갔어. 저자가 간암으로 투병하면서 쓴 단상들을 모은 유고집이야. 그 책에서 질병 서사를 보려던 건 아니야. 그런 내용이 상세히 나오진 않아. 삶을 먼 산처럼 관조하게 해. “우연히 펼쳤을 때 문장들이 눈을 뜨면서 빛나는” 책이지.

 

저자 김진영 선생님은 철학자야. 독일에서 아도르노와 베냐민의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소설과 사진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에서 “무소속자의 삶”을 살았어. ‘철학아카데미’ 같은 인문학공동체나 도서관에서 강의를 했어. 덕분에 나 같은 학생 아닌 중생도 철학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선생님은 공부와 사유가 깊고 언어가 유려한데 단독 저서가 없었거든. 왜 책을 안 쓰세요? 물어보면 웃기만 하셨어. 아마 ‘책’의 기준이 엄격해서 그랬던 거 같아. 한 줄도 쉽게 쓰지 않는 사람을 나는 원래 좋아했지.

 

살다 보니 나는 책을 여러 권 냈는데 그래서 그렇지 않은 선생님을 동경했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딱 시구처럼 사는 사람. 시적인 삶, 언제나 살고 싶지. 그거 알아? 그대는 내게 선생님 같은 존재야. 글에 신중한 고집쟁이. 그런 J를 떠올리며 나는 쓰는 생활에 균형을 잡았어. 혼자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청하기도 했고. 내 글 좀 봐줄래? 귀찮게 했지.

 

나의 문우(文友) J. 가까운 친구의 암 발병 소식이 올 상반기에만 세 번째야. 인간의 유한한 삶. 질병은 생의 기본 값이고 언제 겪느냐 시기의 문제라는 것, 책에서 본 내용을 삶으로 증명할 때가 왔음을 느껴. <아침의 피아노>에서 배운 표현이 있어. 병을 앓는 일이 죄를 짓는 일처럼, 사람들 앞에 서면 어느 사이 마음이 을의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환자의 당당함을 지켜야 한다”고.

 

너무 멋진 말이지. 환자의 당당함. 나부터 환자 친구의 당당함을 가져야 그대도 당당한 환자가 되겠지. 존재는 연결돼 있으니까. 김진영 선생님 식으로 말하자면,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나의 몸은 타자들의 그것과 분리될 수도, 격리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나의 몸은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내 것이기도 하다.” 아픔은 너무도 혼자의 일인데 투병은 다행히 모두의 일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했어.

 

저번에 봤을 때 그대가 그랬지. 읽었던 책들이 발병 이후 새롭게 보인다고. 형광펜 파티하고 있다고. 나도 그러네. <아침의 피아노>에서 좋았던 부분은 여전히 좋은데, 아픈 몸들을 떠올리면 구체적으로 좋아. J에겐 활자의 약효가 가장 빠르다는 것을 아니까 특히 그래. 이 책이 주는 온화함, 다정함, 부드러움 같은 조용한 감정들이 그대의 등을 어루만져 줄 거야. 그리고 J를 쓰게 하겠지. 아마도 형광펜을 색색으로 입힐 이 문장 때문에.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글쓰기의 본질은 나눔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마음 어딘가 작게 부서지는 느낌’을 기록하면서 그대는 나날이 확실해지겠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7101501011&code=960205#csidxaad3fe642f8b471a509745db920e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