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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은유의 책편지 - 아이들의 계급투쟁

고등학교에 강연을 가면 학생들이 제게 묻곤 했습니다. ‘자기소개서 잘 쓰는 법’이나 ‘문창과를 반대하는 부모님 설득하는 법’ 같은 것을요. 그런데 그날 당신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죠. “저는 대학에 진학할 뜻이 없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소속이 없어지는데 누구랑 책을 같이 읽고 토론을 해야할까요?”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대학에 안 간다는 학생도 처음, 제도교육 바깥의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제기한 당사자 학생도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통통 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떠오르는대로 말했습니다. 관심 있는 시민단체나 정당에 들어가 청년모임 활동을 하거나 가까운 동네책방을 찾아가보라고요. 어디 마음 붙일 곳을 찾았는지요? 저도 당신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계속 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지 성별, 나이, 직업, 종교, 성적지향 등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말들이 흘러들고 경합하는 곳이 ‘좋은 공동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대학을 가지 않았어요. 혼자 짬짬이 책을 보다가 스무살에 회사에 들어가서 노동조합을 알게 됐죠. 거기서 같이 책 읽을 사람들, 인생의 길동무이자 길잡이가 되어줄 동지들을 만났고요. 노조는 좋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도 학번 없는 신분이 불편할 때가 많아서 진학을 잠시 고민했어요. 그때 한 선배가 말했죠. “대학 가도 어차피 지금처럼 책 읽고 세미나하고 하는 일은 똑같다”고요.

그렇습니다. 어쨌든 읽고 쓰고 토론하며 청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89년도만 해도 노동자 문학회나 글쓰기, 풍물패 같은 모임들, 지역과 직장을 기반으로 한 배움과 친교의 장이 꽤 있었죠. 요즘 일터는 당신도 말했다시피 유령처럼 가서 일당만 충전하고 오는 곳이 대부분이죠. 말이 섞이고 관계가 자라는 삶터는 아니게 됐어요.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한 사람의 고유함을 진득하게 알아갈 수 있는 ‘일상의 시간과 장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사회가 된 것입니다.

“없어진 것, 그것이야말로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계급투쟁>이란 책을 읽다가 번개처럼 다가온 문장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영국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있는 무료 탁아소에서 보육사로 일하며 쓴 기록이에요. 복지제도가 밑바닥 사회를 어느 정도 지탱해주던 ‘저변 시대’와 생활을 위한 지원금이 모두 끊긴 ‘긴축 시대’의 경험을 비교해요. 긴축 시대가 되자 탁아소가 폐쇄되고 그 공간이 푸드뱅크로 변해버립니다. 그걸 본 저자는 낙담하며 말해요. 지금은 없어진 것, 그러나 분명히 그곳에 있었던 것이 있다. 그것은 ‘존엄성’이다.

저는 탁아소를 ‘인간 대 자본의 전쟁’이 일어나는 최전방의 상징으로 읽었어요.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에 제일 먼저 타격을 입고 가장 약자가 모여있기에 사회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탁아소가 쉽게 폐쇄되는 사회에선 청년들이라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긴축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고독하게, 그리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쁠 것이 분명하다는 어두운 전망을 품는 젊은이를 양산한다”고 말합니다.

‘집도 절도 없다’는 말을 당신도 들어보았지요? 집과 절은 인간 생활을 떠받치는 두 중심 축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집도 중요하지만 절이라는 출구가 없으면 집은 따뜻한 감옥일지도 몰라요. 의식주만 해결한다고 존엄이 보장되진 않으니까요. 저만 해도 사람답게 살아갈 힘과 배움을 얻은 곳은 노조나 인문공동체 같은 ‘절’이었어요. 당신이 찾는 곳도 비빌언덕이 되는 ‘절’이겠지요.

‘대학을 나와야 사람 대접받는다’는 말이 안타깝게도 한국사회에 아직 통용됩니다, ‘절’의 사회적 기능을 대학이 독점한 부조리한 현실의 반영이겠죠. 게다가 코로나시대가 되자 ‘절’부터 빠르게 폐쇄되었고요. 젊은이들마저 내 ‘집’ 마련의 꿈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시절이기에 ‘절’을 찾는 당신의 선언이 더욱 반가웠습니다. 당신이 비록 갈 곳을 찾지 못해 다시 대학으로 들어가더라도, 순순히 따르지 않았던 단 한번의 결기가 당신 존엄을 지켜줄 것입니다. “하나의 커뮤니티에서 담담하게 시작되는 변혁”, 그러나 “지름길은 없다”는 저자의 조언을 전하며 인간다운 삶을 모색하는 당신의 계급투쟁을 지지합니다.

 

*경향신문 기사 보기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161354001&code=960205&fbclid=IwAR2rhAJX4FrUTQwP-4gRnXTtirqxC7YFJIqwgqwJqVczIwPwBZ3RsNjSVCo#csidx596968a0317d74bb34beff2d8a0bdc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