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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은유의 책편지 - 어쩌면 이상한 몸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평범한 모든 순간들”이란 가사가 귀에 감겼어요. 어떤 연애가 평범한 걸까요. 한 친구는 수차례 파국을 맞으며 지독한 연애를 했습니다. 애인과 사이가 좋을 때는 소식이 없다가 관계가 틀어지면 제게 연락이 왔죠. 실망, 상처, 불화의 말들이 눈송이가 아니라 흙먼지처럼 날리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같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죠. “당장 헤어져.”

당신이 보낸 편지에도 이성애 연애 서사가 담겨있었습니다. 첫줄부터 놀라웠어요. “때리거나 욕한 적은 없어서” 임신중단(낙태) 수술을 몇 차례 하면서도 수년을 그와 만났다고요. 다행히 지금은 “죽음 앞에서 도망치듯”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아,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나요. 아마 당신이 제 친구였다면 저는 또 ‘제발’ 그만 만나라고 뜯어말렸겠지요.

글쓰기 수업에서도 혹독한 연애사를 간혹 접합니다. 데이트폭력이라는 단어가 없을 때도 연인 관계에서 정서 착취와 폭력은 늘 있었지요. 욕설, 물리적 가해, 무리한 성관계 요구, 일방적인 연락 두절 등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평범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편지에 썼습니다. 미투 운동을 통해 “나처럼 피해받고 힘든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고요.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낍니다. 당사자의 말하기가 고통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 또 서로가 서로의 용기가 된다는 사실도요.

우리에겐 “인생의 참고자료”가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기 욕망과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와 용기도 비축해야 하고요. 그래서 저는 요즘엔 어설픈 연애상담 대신 이 책을 내밉니다. <어쩌면 이상한 몸>입니다. ‘장애여성의 노동, 관계, 고통, 쾌락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달렸죠. ‘장애여성공감’이라는 20년이 넘은 장애여성 인권운동 단체에서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불굴의 의지로 정상성에 도달한 장애 극복 서사가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며 사회와 제도를 바꾸며 살아온, 고분고분하지 않고 위험한 사람들 이야기가 담겼어요.

‘레드’ 이야기도 금기를 넘습니다. 레드는 열살 때 뇌병변 장애 1급 판정을 받고 휠체어를 탑니다. 9년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살다가 열아홉에 직업재활원에 갑니다. 스물일곱에 미대에 입학하죠. “내가 저지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무에게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하나씩 체득합니다. 레드는 우연히 장애인을 돕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수술과 재활로 상태가 나아져요.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씨에게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린다”는 이야기를 하며 프로그램은 끝이 나고요. 그런데 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레드는 사실 인생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레드가 앉아서 밥을 먹게 되어 ‘사람답다’고 했지만 ‘사람답지 못했던’ 시절에도 밥을 먹고 대학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누군가와 섹스를 했다고 말입니다. 레드는 자신의 성적 욕망과 경험을 주저없이 들려줍니다.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레드에게도 성에 관한 첫 기억은 성추행이다”라는 말로 한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 서사가 시작돼요.

레드의 용기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영감의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장애 유무와 무관하게, “성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몸과 외모의 조건 때문에 자신이 탐색할 기회를 박탈 당한” 이들의 말문을 자연스럽게 틔워주거든요. 한 사람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주체적인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평소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대화하고 실행하고 실패할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드 말대로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데 섹스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 책의 다른 이야기도 값집니다. 장애여성이 들려주는 양육, 노동, 통증, 나이듦, 활동보조를 받는 경험들은 제가 비장애인으로 살면서 쌓아온 기존의 생각을 흔들어놓았습니다. 특히 이런 대목요. “사람이 태어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무런 장애나 아픔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어떻게 ‘장애가 없고, 아프지 않은 상태’가 ‘정상’이 될 수 있을까.”

정말 멋진 통찰 아닌가요. 사랑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아픔 없는 연애는 불가능하겠지요. 다만 고통을 삶의 에너지로 만드는 일은 가능할 것입니다. 당신이 편지 끝에 써놓은 결심도 그런 작업이겠지요. 미투 운동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 고통스러워서 뉴스 창을 켜지도 못하다가 이제는 ‘내가 언론 속의 피해자구나’ 알게 됐고 모든 경험과 기억을 잘 써보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글을 첫눈처럼 기다리겠습니다. 사랑하는 몸들의 더 많은 이야기가 기록될 때 더 많은 몸들이 해방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상한 몸’들과 연결된 당신의 서사가 솜사탕 같은 유행가가 담지 못하는 사랑의 환부를 직시하게 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201344001&code=960205#csidxc19070ec0d17c0cb35c0e5fd5ef0b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