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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언프리랜서 생존기

유채꽃 사진이 sns에 올라올 무렵 제주에 갔다. 출발 전까지 원고를 마감하려고 했으나 끝내지 못했다. 비행기가 연착되면, 잠이 안 오면, 설마 바다를 보는 일이 지루해지면 ‘한 줄’이라도 쓸까 싶어 노트북을 챙겼다. 안 읽을 것을 알면서도 기필코 시집 한 권 끼워 넣듯, 안 쓸 것이 확실하지만 뺄 수도 없다. 노트북은 여행자 보험처럼 사용 확률과는 상관없이 ‘있음’만으로도 심신 안정에 기여한다. 일박 이일 동안 가방에서 곤히 자던 그것을 공항 검색대에서 주섬주섬 꺼낼 땐 혼자 머쓱했다. ‘에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겁긴 또 왜 그리 무거운지. 


이 딜레마는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닌 듯하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친구랑 식사를 했다. 그가 메고 나온 검은 쇼퍼 백 안에 납작한 쇳덩이가 얼핏 보인다. 밥 먹으러 나오는데도 노트북을 가져온 거냐고 물으니 아이패드도 있단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면 바로 이미지를 보낼 수 있어야 하기에 어딜 가든 지닌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친구도 외출 시 노트북을 필참한다. 머릿속이 온통 작업 생각으로 차 있다며 한숨처럼 말을 뱉는다. 
“딱 하루만 퇴근해 봤으면 좋겠어!”


그 말이 내 맘이다. 무소속 창작자의 생활은 분야 불문 어슷비슷하다. 노트북이 이동식 사무실이자 직속상관이다. 언제 어디서나 상시 업무 체제가 갖춰져 있다. 그런데 넋두리 포인트는 ‘퇴근’이라기보다 ‘하루’에 있다. 일 자체가 싫다기보다 일을 일상에서 끊어 내기 어려운 구조에 대한 한탄이랄까. 노트북은 닫아도 생각은 꺼지지 않으니까 그 점이 버거운 것이다.


강연에서 사람들이 묻는다. “작가님 글 한 편 쓰는 데 몇 시간 걸려요?” 혹은 “이 책 쓰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글쓰기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측량하는 기준은 애매하다. 일과 휴식이 분리되지 않는다. 어떤 논픽션 작가가 이런 글을 썼다. ‘자료를 찾아 놓고 2주간 누워 있었다. 글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까닭이다.’ 이때 작가가 누워 지낸 보름 남짓은 작업 시간에 포함될까 포함되지 않을까. 그가 일어나서 노트북 앞에 앉으면 그 순간부터 출근일까. 아마 누가 이 작가를 지켜봤다면 수군거릴지도 모른다. “왜 글 안 쓰고 빈둥거려? 하루키는 매일 아침 조깅하고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글을 쓴다는데, 저러니까 저렇지, 쯧쯧쯧……”


나 또한 하루키나 칸트처럼 규칙적으로 일하진 않는다. 그러나 머릿속 한구석은 늘 일하는 중이다. 글쓰기의 시작인 글감 찾기는 연중무휴로 이뤄진다. ‘무엇을, 왜, 쓸 것인가’라는 말풍선을 항시 머리 위에 띄우고 다니는 느낌이다. 흔히 과거는 지나간 일이라고 하지만 나의 경우 ‘지나가지지 않는 일들과 말들’이 글감이 되곤 한다. 왜 자꾸 생각이 날까, 그 생각을 생각한다. 사유가 발아하고 글감이 정해지면, 설거지를 하거나 고양이 털을 쓰다듬거나 승강기를 타거나 신호등을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에 첫 문장을 고민한다.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지는 않지만 이처럼 정신의 쓰기 활동이 이뤄지는 시간들까지 고려하면 일상이 곧 작업이다. 잠들면 퇴근인가? 그렇지도 않다. “울면서 잠든 밤사이에 문장이 탄생한다”는 말이 있으니까.


이토록 퇴근이 없는 삶이라니! 그래도 나는 좋다. 퇴근 이후에야 비로소 ‘나 자신’으로 출근하는 것 같았던 직장 생활이 불행해서 택한 일이고 길이다. 다행히 나는 생각하는 것, 대화하는 것, 글 쓰는 것을 ‘인생 삼락’으로 여기고 있기에 그것들로 하루를 채우는 생활이 부담은 돼도 불만은 없다. 아, 불안은 있다.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쓴다는 핑계가 사라지고 고정 수입이 사라지는 일상은 생각보다 초조하다. 


가끔 직장을 관두고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고민 상담이 들어온다. 그럴 때 나는 매일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는 생활력, 최소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는 재력,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글을 왜 쓰고 싶은지 욕망의 크기와 방향을 점검하라고 말한다. 그래야 아침, 점심, 저녁, 심야까지 글 앞에서 떠나지 못하는 삶, 날마다 숙제처럼 주어지는 하루를 감당할 수 있다. 나 역시 시간의 망망대해에서 노트북을 구명조끼처럼 몸에 부착한 채 홀로 떠 있는 나날들이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불만족보다 바다 위의 불안을 택한 것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용기를 내고 있다.

 

-언유주얼vol8에 '퇴근'을 키워드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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