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7.08.13] 읽고 쓰지 않을, 권리 (2)
  2. [2017.05.20] 노 키즈 존은 없다 (2)
  3. [2017.02.25] 어른들의 말하기 공부 (6)
  4. [2016.10.29] 말하는 누드모델
  5. [2016.10.01] [한겨레-삶의창] 내 인생이 그렇게 슬프진 않거든요 (2)
  6. [2016.08.27] 한겨레 - 여름 제사 (4)

읽고 쓰지 않을, 권리

[은유칼럼]

사교육으로 유명한 지역에 강의를 갔다. 앞서 단체 대표가 교육 특구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인사말을 전하더니 여러분들이 글쓰기를 잘 배워두었다가 아이들에게도 알려주라며 자리를 떴다. 객석 대부분은 주부였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취지를 바로잡았다.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가르치지는 마세요. 엄마의 옷을 벗고 본연의 나로 사는 방편으로서 글쓰기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분이 손을 들었다. 6학년 아이에게 독서록을 쓰게 하는데 아이가 싫어한다며 무슨 방도가 없냐는 것이다.


엄마 모드는 웬만해선 해제되지 않는다. 아니다. 학부모만이 아니라 교사들도 읽기와 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골치라며 묘책을 묻곤 한다. 그럴 땐 되묻는다. 왜 아이들이 꼭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돌아오는 답은 사고력, 독해력, 이해력 향상 그리고 건전한 여가 선용으로 수렴한다. 그 자동 설정된 믿음은 신앙처럼 견고하다. 인습적 견해와 상식을 의심하고 자기 삶의 맥락에서 따져보는 게 글쓰기 공부인데 글쓰기를 해야 하니까 일단 쓰라는 식이다. 결론을 근거로 삼는 순환 논증에 갇혔다.


내가 아는 배움의 최고 동력은 절실함이고 필수 조건은 덩어리 시간이다. 당장 생존에 필요하지도 않고 (놀) 시간도 없는 아이들에게 글을 쓰라니 얼마나 고역일까. 자투리 시간으로 학습지 하듯 해치우는데 생각이 여물까 싶다. 6학년 학부형에게 제안했다. 어떤 점이 힘든지 아이에게 물어보고 독서록을 당분간 쉬어보라. 자기 의견과 생각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경험하게 하라. 그래야 아이에게도 의견과 생각이 형성되고 글도 잘 쓴다고 말이다.


사실 그 마음 모르지 않는다. 나도 엄마로서 아이 손에 스마트폰 대신 책이 놓여 있길 바란다. 집에 책이 널려 있으면 우연히라도 손에 닿아 펼쳐 볼 텐데 무슨 몹쓸 것인 양 만지지도 않는 아이들과 나는 산다. 글은 오죽하랴. 처음엔 섭섭하다가 속으로 비난했는데 지금은 내버려둔다. 책 읽는 엄마니까, 아이 뜻을 존중해줘야지 최면을 걸다가 아이가 아직 본능이 살아 있어서 ‘거부’도 하는구나 건강하다는 징표로구나, 해석술을 발휘하는 단계까지 왔다.


대한민국 학부모로서 느끼는 우려는 비슷할 거다. 아이가 책-학업을 멀리한 대가로 가난과 불행을 면치 못할까봐 걱정스럽다. 그런데 요즘 난 다른 층위의 근심이 생겼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군, 직장, 학교, 가정에서 자행되는 상상 초월 위계 폭력과 젠더 폭력 뉴스가 터진다. 저 정글에서 아이가 남을 해치지 않고, 자기를 침해하는 것들에 저항하면서 존엄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을지 염려한다. 해결책은 책이런가. 강제적으로라도 읽히는 게 좋을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나 교사가 시키는 무리한 것들을 ‘싫어도’ 해낸다면 훗날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이 시키는 별의별 일도 ‘싫은데’ 꾸역꾸역 감당할 여지가 있다. 복종은 습관이다. 성찰 없는 순종이 몸에 배면 자기의 좋음과 싫음의 감각은 퇴화한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를 지키기 어렵다.


시급한 건 ‘자기 돌봄’이다. 수능 고득점의 초석을 다지는 독서와 논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는 법을 들여다볼 기회와 자기 억압을 털어놓을 계기가 필요하다. 그게 나에게는 책과 글쓰기였는데 내 아이에게는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하나는 알겠다. 해봐서 안다며 책부터 들이밀면 아이가 스스로 가꾸어갈 경험과 사유의 자리가 막힌다는 사실이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격려받는 만큼 싫어하는 아이의 권리도 존중받기를. 입막음을 당하는 약자에겐 행동하지 않음도 행동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6499.html?_fr=mt5#csidx26bdca53ab180fc91f5d8c22feaf394 

저작자 표시
신고

노 키즈 존은 없다

[은유칼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좌를 열었을 때다. 한 여성이 꼭 읽고 싶었던 책이라며 아기를 데리고 참가할 수 있는지 물었다. 생후 12개월 남아랬다. 두 마음이 다퉜다. 마음 하나. ‘공부하러 나와서까지’ 아이를 보고 싶지 않다. 내게 아이란 존재의 훼방꾼, 공부의 대립물이었다. 책 한 줄 보겠다고 아이의 숙면을 얼마나 애태웠던가. 마음 둘. 아이를 달고서라도 ‘공부하러 나가고픈’ 그 여성의 열망은 불과 얼마 전까지 내 것이기도 했다. 외면하면 반칙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 평생 단 한 번의 기회라는 마음으로 결정했다. 학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우리는 공부한다. 아기라는 불편한 존재를 배제가 아닌 관계의 방식으로 우리 삶-공부에 들여 보자고. 문제가 생기면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아기는 온순했다. 기적처럼 두세 시간을 내리 자기도 했고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필기구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간혹 수업이 끊겼지만 여느 수업의 흐름을 벗어나진 않았다.


영유아와 함께 수업이 가능하다는 선례와 신뢰는 그렇게 생겼다. 엄마의 시도, 동료의 협조, 아이의 견딤. “남편이 일찍 온다고 해놓고 늦어서요” “맡길 곳이 없어서요” 요즘도 가끔 아이를 데려가도 되는지 엄마들은 문의를 하고 아이들은 장학사처럼 수업에 슬그머니 들어온다. 또한 곁에 없다 뿐 전화로 수업에 끼어들기도 한다. 엄마 학인은 주로 강의실 ‘문간’에 앉는데 아이에게 긴급한 연락이 오면 튀어나가 전화를 받기 위해서다.


이 육아·공부 병행의 난리통에서 난 외부자였다. 공부하는 여성들의 분투를 지지하고 조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긴급 호출이 왔다. 군에 간 아이의 전화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제가 걸 순 없고 오는 전화만 받을 수 있거든요. 문자도 안 되고….” 일이분가량 수업 중단을 초래한 나는 일이분 정도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누가 뭐라지 않아도 저 혼자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무살 넘은 군인 ‘아이’ 때문에 양해를 구하게 될 줄이야. 도대체 인간은 언제 어른이 되는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공부하지만 공부하면서 사람답게 살기는 퍽 어렵다. 공부든 일이든 하나의 목적성에 갇힌 사람은 앞만 본다. 관계를 놓치고 일상을 망친다. 내 경우 그 자기모순에서 헤어나오도록 도운 건, 무력한 아이다. 틈만 나면 떼어버리고 싶었지만 떼어지지 않는 성가신 존재가 복잡한 삶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도록 환기시켜준 것이다.


‘노 키즈 존’이란 말을 보고 철렁했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며 식당이나 카페에서 아이들 출입을 금한다는데 그 논리가 옹색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면서 어른이 됐다. 여전히 힘 있는 어른들은 자기보다 약자의 시공간을 임의로 강탈하면서 자기를 유지한다. 왜 아이들을 대상으로만 권리를 주장할까. 그래도 되니까 그럴 것이다. 나 역시 양육의 책임을 나누지 않는 어른(배우자)에게 가야 할 원망이 애꿎은 아이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


인간 사회는 민폐 사슬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사회성을 갖는다. 살자면 기대지 않을 수도 기댐을 안 받을 수도 없다. 아기를 안고 공부에 나선 엄마처럼 폐 끼치는 상황을 두려워 말아야 하고 공동체는 아이들을 군말 없이 품어야 한다.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5467.html?_fr=mt5#csidx686b75dac6a85a0bcf25b75e5602136 

 


저작자 표시
신고

어른들의 말하기 공부

[은유칼럼]
새봄 새 학기, 급식 메뉴도 맛있고 문화체험 행사도 많아 기대에 들뜬 소년은 선생님의 다급한 부름을 받는다. 엄마의 부고 소식이다. 교통사고로 엄마를 떠나보낸 때가 열다섯.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나이가 있진 않겠으나 검은 상복이 안 어울리는 연령대는 있다. 그 소년은 스물한살이 되어 그날의 상황과 심정을 글쓰기로 풀어냈고, 어린 상주에게 감정이 이입된 동료들은 숨죽였다.

얼마 전 글쓰기 수업 장면이다. 그가 낭독을 마치자 예의 침묵이 한동안 감돌았다. 합평은 늘 긴장된다. 이런 경우처럼 상실 경험이라면 더하다. 글이 묵직하니 말이 더디 터진다. 적절한 위로와 지적의 말을 찾느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불쑥 삐져나온 자기 기억과 대면하느라 저마다 머릿속이 바쁘기도 한 거였다.

이 침묵, 이 머뭇거림을 나는 한때 견디지 못했다. 글쓴이가 울컥해 낭독을 멈추면 내가 대타로 나서 읽어주었다. 낭독 이후 의견이 없으면 말의 물꼬를 트려고 애썼다. 그럴수록 표현이 궁했다. 가령, 친족 성폭력은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삶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다. 별일 아니라고 말하기엔 별일이고, 별일이라고 말하기엔 별일이 아니어야 산다. 삶의 아이러니 앞에서 말은 무력하다. (듣고 나서 무어라 말해야 좋은지 당사자에게 물어보았더니 “믿고 말해줘서 고마워”라고 했다.)

한번은 나도 상념에 빠져 주춤하는 사이 다른 동료의 발언으로 토론이 진행된 적이 있다. 왜 꼭 먼저 나서려 했던가 싶어 민망했다. 한발 뒤로 물러서니 침묵의 다른 기능이 보였다. 침묵은 정지의 시간이 아니라 생성의 시간이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하지 않고자 언어를 고르는 시간, 글을 쓴 이의 삶으로 걸어들어가 문장들을 경험하고 행간을 서성이고 감정을 길어내는 활발한 사고 작업의 과정이다.

나는 내 시행착오를 학인들과 공유했다. 침묵을 견디는 법, 그리고 글에 대한 평가와 삶에 대한 평가를 구별하는 방법을 얘기했다. 만약 어린 상주의 글을 읽고서 ‘부모 없이도 잘 자란 훌륭한 사람 많다’고 말하는 건 삶에 대한 평가다. 덕담 같지만 압박이다.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끌고 오는 게으른 태도다. 엄마가 없어서 언제 제일 힘들었는지 결정적인 한 장면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 글에 대한 평가다. 한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려는 노력의 발로다.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하다. 글에 대한 평가가 더 구체적이고 다정하다. 해결사가 아닌 듣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면 된다.

그날 발표자 학인은 후기를 남겼다. “무슨 용기로 엄마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했는지(…) 아마 정리를 하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글 쓰는 작업이 처음이라 읽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다며 그는 퇴고를 다짐했다.

읽고 쓰고 말하고 고치기의 반복. 이 고된 노역을 우리는 왜 자처하는가. 글쓰기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정리해본다. 삶이 고차함수인데 글이 쉽게 써지면 반칙이다.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고심하다 보면 자신을 스스로 속일 가능성이 줄어들고, 몸을 숙여 한 사람의 내면의 갱도에 들어가는 훈련으로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모든 사물과 현상을 씨-동기-로부터 본다”(김수영)는 것,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타인의 처지가 되어보는 일, 사람살이에 꼭 필요한 이것을 교육받을 기회가 드물었던 우리는 글쓰기를 핑계 삼아 공부하고 있다. 꼰대발언, 혐오발언이 승한 시대에 말을 지키는 것은 나를 지키는 것이기도 하니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4097.html?_fr=mt5#csidxe2d3af335abd7509266efb7c208a3a5 


저작자 표시
신고

말하는 누드모델

[은유칼럼]

‘나는 해부학적으로 그려져 걸릴 것이다/ 훌륭한 박물관에. 부르주아들이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겠지/ 이런 강변의 매춘부 이미지에 대고. 그들은 그걸 예술이라 하지.’


영국 시인 캐럴 앤 더피의 <서 있는 여성 누드> 일부다. 시의 화자는 누드모델. 자신에게서 ‘색을 뽑’고 움직임을 통제하며 권력 감정을 느끼는 화가를 ‘조그마한 남자’(little man)로 부르고, 누드화에 감탄하는 영국 여왕을 ‘웃긴다’고 말한다. 이 시에서 여성은 그려지고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다. 자신을 보는 화가-관객을 보는 시선의 전도로 인해 역사상 목소리를 가진 적 없는 누드모델이 견자(見者)로 등장한다.


친구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이탈리아에서 미술관엘 갔는데 길게 늘어선 줄이 거의 여성이더란다. 전시실엔 백인 남성 화가 작품들만 걸려 있음은 물론이다. 관람을 마치고 바닷가에 갔더니 미술관에서 안 보이던 남자들이 해변에 누워 여자들을 감상하고 있더라나. 왜 여자는 보여지고 (그걸 또 돈 내고 보고) 남자는 창작하게 된 거냐고 푸념했다.


그런데 위의 시에 따르면 화폭 속 여자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가만히 있지만은 않는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을 관찰해 통찰을 얻는다. 그는 ‘해야만 하니까.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 그저 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화가나 자신이나 같은 처지라며 이런 시구를 남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인간사를 아우르는 간명한 명제다. 난 일전에 한 남성 철학자의 책을 읽었는데 서문에는 이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걸렸고 몸이 어떻게 탈진됐는지 병명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 비슷한 시기에 빵집 아줌마 얘기를 들었다. 김밥집에서 수년간 일한 그는 김밥을 하도 말아 손목 관절이 손상돼 그만두고 시장통 빵집에 겨우 취직했다. 빵 담고 거스름돈 내주는 일이 망가진 손목으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작인 탓이다.


어떤 직업은 노동의 결과물이 보존되고 과정의 수고로움이 기록된다. 존경과 동경을 받는다. 어떤 직업은 아니다. 노동의 성과가 사라지고 고충이 음소거된다. 폄하와 무시를 당한다. 사회적 무지와 몰이해. 그것이 직업의 귀천을 만들고 구조적 불평등을 낳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직업이, 몸이 축난다는 점에서 단순직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전문직이다. 저 ‘누드모델’이 응시하듯 누군가를 깊게 들여다본 적 없는 우리는, 서로를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내 직업 작가도 학자와 더불어 문(文)을 숭상하는 한국 사회 유교적 전통의 수혜 직군이다. 가난해도 대접받는 편이다. 그런데 글 쓰는 직업에도 위계가 있다. 자유기고가와 르포르타주 작가로 일하는 내게 사람들은 예사롭게 묻는다. “시나 소설은 안 쓰세요?” “등단하셔야죠.” 저 순문학 세계에 이르는 길 어디쯤에 비소설 분야 문필하청업자 자리가 있지 싶다.


장르는 갈래다. 장르 자체가 작품의 고귀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직업이 인격을 담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권력에 빌붙어 합리적 생존성만 따지는 의사나 법조인이 있고, 약자에게 다정한 (성)폭력을 휘두르는 문인과 교수가 있다. 특정 직업에 덧씌워진 환상을 벗겨내고, 그 일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다른 존재를 억압하진 않는지, 어떤 관점을 내포하는지 ‘해부학적으로’ 따져야 한다. ‘나는 볼 수 있다’고 말하는 누드모델처럼, 보여질 때조차도 보는 사람이 예술가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7850.html?_fr=mt5#csidxeadf8fc1bd4f6978e99e915ef7a03fd 

신고

[한겨레-삶의창] 내 인생이 그렇게 슬프진 않거든요

[은유칼럼]



아이들이 이백 명 넘게 있더라, 생각해보니 나 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도 보육원에 사는 애가 없진 않았을 거 같아. 업무차 보육원에 다녀온 친구가 말했다. 그 아이는 반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못하고 남들처럼 부모형제와 사는 듯 지냈을 텐데 싶어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나와 같은 시간대를 통과했을 한 아이를 나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의 가슴은 때때로 얼마나 졸아드는가.


예전에 보육원에서 만난 취재원이 떠올랐다. 원생이 성인이 되면 약간의 생활자금을 갖고 시설을 나간다고 말했다. 난 좀 놀랐다. 방 한칸 구하기 어려운 소액으로 가족도 없는데 어떻게 자립을 하느냐며 살짝 분개했던 거 같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기가 그 경우랬다. 시설에서 살다가 스무 살에 독립해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이곳에서 일한다고. 그러니까 나는 ‘보육원 출신 성인’이라는 추상적 인격을 상정하고 걱정인지 동정인지 모를 감정을 표출했는데, 그 실제 인물이 눈앞에 있었던 거다. 소매 걷은 흰 셔츠 입은 이십대 여자의 침착한 얼굴로.


한 움큼 부끄러움을 삼키며 나는 배웠다. 동정이든 차별이든 그 아래 깔린 근본 생각은 다르지 않다는 걸. 어떤 대상을 자기 삶의 반경에 없는 분리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고아들이 불쌍하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특정한 면만 부각시켜 인격화하는 것(장애인은 무능하다), 자신은 결코 되지 않을 이질적 대상으로 상대를 보는 것(공부 안 하면 노숙인 된다). 하나같이 타자화하는 말들이다.


배울 일은 계속 일어났다. 장애여성들과 글쓰기 수업을 할 때다. 손 움직임이 불편한 학인이 A4 용지 두 장 분량의 과제를 제출했다. 구족화가처럼 발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렸을까? 어떻게 썼는지 물었더니 스마트폰을 코로 눌러 글을 써서 컴퓨터 문서에 옮겨 출력했단다. 난 또 놀랐다. 코로 글을 써요? 옆에 있던 활동가가 코로 게임도 엄청 잘한다고 일러줘 다같이 웃었다.


코로 글을 쓰는 그는 연극도 하고 아이도 키우고 강의도 한다. ‘장애의 이해’란 주제로 인권 교육을 나가는데, 사람들이 휠체어를 타고 말투가 어눌한 그를 강사보다는 딱한 장애인으로 보는 모양이다. 교육이 끝나면 다가와 ‘꿈을 잃지 말고 살라’ ‘얼굴은 예뻐서 다행이다’라고 말하거나 불쌍하다고 끌어안고 우는 사람도 있단다. 이 촌극 같은 상황을 두고 동정심만 키운 망한 교육이라며 그는 웃음 머금은 채 말한다.


“내 인생이 그렇게 슬프진 않거든요.”


안 보이는 사람의 나라가 있다. 삶에 대한 상상력이 직업에 대한 정보력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보니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사람의 이야기는 사라져간다. 남성, 이성애자, 서울 출신, 명문대 졸업, 전문직 종사자로 표상되는 소위 정상적 삶의 서사는 매스컴으로 구전으로 맹렬히 유통되는 반면, 거기서 벗어날수록 삶의 서사를 구성하기가 어렵다. 장애여성 강사처럼 자기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말할 기회가 드물고, 겨우 말한다 해도 오해나 동정을 산다. 그런데 남에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를 알기 어렵고 사회에 자신을 위치 지을 수도 없다. 말소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사람을 단정하는 내 ‘꾸준한 고집’으로 눈앞에서 놓쳐버린 무수한 타인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듣기를 시도한다. 저마다 처지와 형편과 고민을 말하고 듣고 상상하는 동안 서로의 존재 정착을 도우리라. 




2016. 10.1

신고

한겨레 - 여름 제사

[은유칼럼]


시적인 게 뭐예요? 시 수업에서 질문이 나왔다. 난 오래된 시집에서 본 설명에 기댔다. “그 시적인 것은 뭐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고, 딱히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쩌면 선적인 것과 닿아 있는지 모르겠다.”(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64쪽) 그리고 예를 들었다. ‘여름 제사’ 같은 게 아닐까요?


저 오늘 여름 제사 지내러 가요. 얼마 전 지인이 지나가듯 하는 말에 몸이 움찔했다. 여름 피서가 아니라 여름 제사. 이 빗나가고 거스르는 말들의 배열이 내겐 너무 시적으로 다가왔다. 삼복더위에 호화로운 휴가 한번 즐기지 못한 엄마는, 자식들 콩국수 만들어 먹이고 아버지 술안주로 부침개 부치느라 가스불 앞을 떠나지 못하고 낑낑대던 엄마는 한여름에 돌아가셨다. 써보지 못한 여권사진이 영정사진이 됐다. 10년 전이다. 나는 10년째 여름 제사를 지낸다.


서울 36도. 올해 엄마 기일도 무더웠다. 가스불 앞에서 쇠고기 무국을 끓이고 전을 뒤집고 산적 고기를 익히는 나는 엄마가 되어 엄마를 본다. 가슴골로 맹렬하게 흘러내리는 땀줄기가 건드리는 그 무엇. “너 키울 때 자는 동안에도 계속 부채질해줘서 땀띠 한번 없이 여름을 났다”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단지 ‘고생한 엄마’라고 말하면 많은 것이 빠져나가 버리기에 말할 수 없는 여성 억압의 중추를, 엄마의 어떤 생을 몸으로 반복한다. 늘 있지만 잘 눈여겨보지 않는 삶의 자리, 여름 제사.


강남역 8번 출구에서도 여름 제사를 지낸다. 사계절 영정사진이 놓인 곳. 천막을 치고 삼성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의 넋을 기린다. 고 황유미 아버지 황상기씨는 속초에서 서울로 달려와 입사원서 사진이 영정사진이 된 딸의 제사를 지낸다. 9년째다. 빌딩 숲속 실외기의 후덥지근한 열기와 9차선 도로의 시커먼 매연 속에서 죽은 자의 못다 한 이야기를 알리고 산 자의 살 권리를 이야기한다. 기록적인 폭염의 절정에서 반올림 활동가 공유정옥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날씨 덕분에 반올림 오성급 호텔 사우나를 습식 사우나로 업그레이드하였습니다. (…) 보습기능이 증진되었고, 노폐물을 쫙쫙 빼주니 체중도 줄었어요. 강남역 8번 출구 앞 1분 거리 삼성 딜라이트 홍보관 앞에 있습니다.”


여름 농성장은 습식 사우나. 말하기에 실패하면서 계속 말하기를 전달하는 이 상황은 또 얼마나 시적인가. 삼성 백혈병 문제 보상을 위한 싸움이라고만 하면 너무 많은 것이 생략돼 버리기에 딱히 말할 수 없지만 말하기를 포기할 수도 없다. 이 삶적이고 선적인 무엇. 삼성이 성매매 여성에게 지불한 500만원과 죽어가는 황유미에게 “이걸로 끝내자”며 건넨 500만원의 치욕을 기억하는 것이 ‘사람의 일’임을 증언하는 그곳, 도시의 중심에서 가장 주변이 된 삶의 자리, 강남역 농성장.


시적인 것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힘, 동력, 에너지다. 혹서기에 김포공항 출입문을 통과하는 알록달록한 인파는 시적이지 않다. 잘 보이니까. 김포공항 구석구석에서 꿈틀거리는 땀 위에 스멀거리는 모욕의 말들을 뒤집어쓰고 주물거리는 관리자의 성추행을 감내하며 하루 3만보를 이동하는 청소노동자들, 인간 대접 받고 싶다며 삭발에 나선 그들의 몸에서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눈물과 땀은 시적이다. 잘 보아야 보이니까.


불볕더위에 불덩이를 떠안고 ‘인간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불러내는 말들, 움직임들, 응답들로 인해 없는 존재가 있는 존재가 될 때 비루함이 고귀함이 된다. 그래서 시적인 것은 있지 않고 발견된다. 여름 제사처럼.



* 한겨레 '삶의창' 2016. 8.27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