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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31] [한겨레] 왕따 생존자의 말하기 (2)
  2. [2012.02.04] 상처의 철학 2 - 기억과 증언의 문제 (6)

[한겨레] 왕따 생존자의 말하기

[은유칼럼]

오래된 농담처럼 ‘왕따’라는 단어를 말하기까지 십수년이 걸렸다. 그녀는 중학생 때 지독한 왕따를 당했다. 3년 내내 혼자 다녔다.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고 들어오면 책상에는 아이들이 남긴 반찬, 그러니까 음식물 쓰레기가 올라와 있었다. 매일 울면서 집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언니가 담임을 찾아가 말했으나 담임은 조회 시간에 주의 한번 주고 말았다. ‘네 동생 왕따라며?’ 외려 언니가 반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약한 것을 비집고 들어가는 괴롭힘은 죄책감 하나 없이 당연해 보였다.


폭력을 꾸준히 당하자 그녀에게도 폭력 성향이 생겼다. 부모가 뒤를 받쳐줄 수 있다면 걸상을 들어 누구라도 내리찍고 싶었다. 외부로 향하지 못한 공격성은 육체의 말단인 손톱을 향했다. 하도 물어뜯어 검지에서 중지로, 중지에서 약지로 손톱에선 늘 피가 번졌다. 밤마다 자문자답의 꼬리물기가 시작됐다. 왜 나한테 그럴까, 내일 학교 가면 나아질까, 가해자 부모를 찾아가서 말할까, 차라리 자살할까…. 인생에서 일어나는 크고 힘든 사건일수록 그렇듯이 그녀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스물셋, 동사무소 헬스장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10년 만에 마주친 그 동창, 시도 때도 없이 쿡쿡 찌르고 욕설을 뱉던 왕따의 가담자는 그 자리에서 사과했다. “미안하다.” 얼결에 이뤄진 재회와 사과를 그녀는 속수무책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열불이 났다. 억압된 것의 회귀. 상대는 죄책감 덜고 살자고 사과했을지 모르나 그녀는 치욕의 불구덩이에 다시 빠져들었다. 뒤늦게 대학에 진학해 시야와 관계를 넓히며 악몽에서 벗어난 그녀는 고통의 언어화 작업을 시도했고 ‘폭력과 기억’을 주제로 글을 썼다.


“말로 받았던 폭력과 그들의 얼굴은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 기억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잊지 않고 있다. 이건 내가 용서해야 지워질 폭력에 대한 기억이다.”


그녀는 나와 함께 글쓰기 공부를 한 학인이다. 자라지 못한 손톱을 부채처럼 펼쳐 보이는 그녀 앞에서 난 몹시도 부끄러웠다. 함부로 하는 사과가 자기기만인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됐고, 왕따의 화살이 내 아이만은 비켜가길 바라는 학부모로 사는 내게 그녀의 증언은 엄중한 진실로 압도했다. “잊지 않겠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택한 ‘존엄의 회복’의 수순이 꼭 그와 같았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이탈리아와 외국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이것이 인간인가> 270쪽)


왕따를 당한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존자가 된다는 뜻이다. 왕따 학생 자살 사건이 사회면 단골 뉴스가 된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니 섣부르게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은 존엄 회복의 노력이고 폭력 근절의 실천이다. 오늘도 손톱을 뜯으며 폭력의 독을 빼내고 있을 아이들은 어떻게 슬픔에 익사당하지 않고 ‘사건의 반복’을 사유하는 생존자가 될 수 있을까.


그녀는 두 가지를 말한다. 눈가가 젖어 있거나 교복이 망가졌거나 “티는 나는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아이들을 살필 것. 당사자는 숨기지 말고 ‘고통 말하기’라는 우연한 시도를 누릴 것. “처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 아픔의 정보를 내주었을 때 상대방도 자기 얘기를 터놓았다. 왕따나 직장 괴롭힘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 한겨레 '삶의창' 2016.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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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철학 2 - 기억과 증언의 문제

[비포선셋책방]

# 사는 능력

아우슈비츠 수수용소에 들어가고 3-6개월이면 어김없이 죽었다. 몇 명은 살았다. 독일어를 몰라서 일찍 죽어간 자들도 많다. 단어 하나 배우기 전에 쓸려나간 것이다. (레비는 침몰당한 자와 구조된 자라는 책을 썼다.) 수감됐다고 다 희생자가 아니라면, 구조된 자들은 무슨 힘으로 살아남았는가. 동물성과 야수성이다. 이것이 있을 때만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았다.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 나오는 사례. 알프레드는 늘 깔끔하고 품위유지를 목숨처럼 여겼다. 남들과 다르게 처세함으로써 신분상승을 이뤘고 특수임무를 맡았다. 앙리는 친화력이 좋았다.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등 약자의 위치를 전격적으로 취했다. 마치 애완견처럼 굴어 살아남았다. 사는 능력은 윤리와 존엄성 포기했을 때 도달했다.

# 권력 속성

카포는 나치친위대인 SS에 협력했던 앞잡이.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 온 사람 중 카포를 뽑았다. 내부를 다스리기 위한 지배전략이다. 피권력자에 속해 있으면서 권력자 행세를 하게 한다. 당시 가스실로 가는 사람들을 카포가 선별했다. 하지만 카포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가스실로 보낸다.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 안 되므로 그도 반드시 죽는다.

어쩐지 익숙한 이야기. 나치의 권력시스템은 우리나라 기업의 구조조정 방식과 일치한다. 사장님이 직접 해고하지 않고 팀장 같은 중간관리자를 시킨다. 퇴출할 직원을 골라내게 하고 해고한 다음에는 머지않아 그 중간관리자를 내보낸다. 주위에 이런 경우를 당한 분을 보았다. 또 하나. 나치 친위대 SS에게는 가정에 충실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대원들은 집에서는 자상한 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삼성이 그랬다. 90년대 즈음, 기업문화 쇄신 운운할 때 직원들이 집에 일찍 가는 요일을 정하는 등 전사적 캠페인을 실시했다. 나치의 조직 매뉴얼을 입수했을까. 나치고 삼성이고 약자의 피로 돌아가는 권력시스템은 똑같은 모양이다.

# 자기유지

아우슈비츠를 체험한 자는 성찰하는 능력이 없다. 원래 체험한 자가 핵심적인 것을 말하는 건 성립하지 않는다. 고통을 직접 겪으면 기억작용이 장애를 일으킨다. 이것이 트라우마. 사유의 의도적 도피는 자기유지의 한 방식이다. 아우슈비츠 당사자인 레비가 부족하고, 지식인 아감벤이나 아렌트가 더 진실한가의 차원은 아니다. 당사자가 겪는 성찰에는 한계성이 있다.

기억의 문제는 곧 증언의 문제다. 그런데 증언은 믿을 수 없음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생존자가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세상에 그게 말이 돼요?”그들의 이야기는 세상의 장벽에 부딪힌다.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다. 지금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들어주지 않는 거다.

나도 자주 쓰는 말. 김진숙 지도위원의 책 봤을 때, 장기농성장 이야기 들을 때, 맑스의 책을 읽을 때, 그 끔찍한 노동현실을 믿을 수 없어 한다. 사회면 흉측한 뉴스들. 학교폭력 가정폭력의 문제에 깊게 탄식한다. “세상에 그게 말이 되는가?” 한숨 쉬고 탄성 속에 날려 보낸다. 어쩌면 습관적인 반응. 각자는 일상적인 자기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들어주지 않는 것이고, 그게 종합적으로는 지금 세상의 유지를 강고히 한다 

# 육체의 합리성

아도르노가 말한 개념 육체의 Ratio. 체험에는 근본적으로 사유작용이 따른다. 육체의 합리성이 들어가 있다. 행동의 사유적 성격이다. 그런데 아우슈비츠 가해자들은 전범재판에서 말한다. ‘나는 모른다’ ‘명령을 따랐다.’ 이것은 자기기만이다.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저들은 사람이 아니래...’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육체의 이성을 거짓으로 만들고 자기가 배운 것(권위, 관습)을 선취하는 태도다. 그로 인해 거짓이 진실이 된다. 내가 믿는 게 진실처럼 되어버리는데 이는 자기유지 전략이다. 희생자는 트라우마 때문에 기억을 위조한다면 가해자는 희생자보다 더 많은 앎이 가능한 상황이지만 명령수행일 뿐이다, 사실은 몰랐다고 자기변론 하면서 위조한다 

# 기억-증언의 불가능성

육체의 기억력은 방어기제가 없다. 육체의 어린아이성. 트라우마는 대상화할 수 없는 기억이다. 언어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 구성된다. 기억될 것은 빠져나가고 내러티브화 할 것만 수렴된다. 기억술. 여기서 말의 욕망이 작동한다. 모든 이야기는 드라마가 되려는 속성이 있다. 이야기 자체의 내용이 맞고 틀림은 중요하지 않다. 말의 자립. 자동기술법의 작동. 이 때부터 내가 언어의 도구로 변해버린다. 언어 형태나 개념들에 의해 사유가 움직인다. 개념이 혼용되어 영향관계가 생기고 영향관계 속에서 나만의 경험이 중화된다. 특수성이 사라지고 보편성이 획득된다. 그로 인해 진실 같은 풍문이 형성되며, 개별적 진실은 그것에 의해 재단된다. 이것이 기억-증언의 딜레마, 불가능성이다.

내가 요즘 천착하는 문제다. 개별자의 고통. 말의 배반. 사회적 약자일수록 자기언어를 갖지 못한다. 자기 삶의 조건의 특수성가 개별성은 늘 범주의 보편성으로 통합된다.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의 충돌. 말을 하면 할수록 진실 혹은 진심에서 멀어지는 경험은 누구나 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도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나의 슬픔이 그 무엇인가로 수렴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일반화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마치 그들이 내게서 슬픔을 훔쳐가는 것만 같아서.”  

레비는 자신의 이름 지을 수 없는 불편함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격세유전적 두려움. 격세유전은 대를 걸러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 이유를 이 시대에서 아우슈비츠 안에서 아무리 논리적, 이론적으로 찾아봤자 불가능하다는 의미. 그 이유는 딴 데서 온다. 하나하나의 육체들이 결정적이다. 이들을 야만의 시대’ ‘나치의 시대 희생자등으로 집단화, 단순화 시키는 것은 폭력이다. 언어의 위반적인 속성. 담론의 무례함이라고 할까 

우리들의 생리학과 병리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수용소에는 점진적인 병이라는 게 없다...아마도 세상의 의사들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그 어떤 고통 때문에 갑자기 죽어버렸다. 세상의 의사들은 위염이나 정신병을 치유해줄 수는 있다. (혹은 증상을 없애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불편함, 지금도 잠 못 들게 하는 어떤 이름 없는 불편함이 있다. 굳이 이름 지어 부르자면...격세유전적인 두려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침몰당한 자들과 구조된 자들>


- 인문숲 김진영선생님 <아우슈비츠 혹은 상처의 철학> 강의를 듣고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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