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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28] 글쓰기는 나와 친해지는 일
  2. [2017.04.20] 채널예스 -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글쓰기는 나와 친해지는 일

[은유칼럼]

‘나는 왜 엄마만 미워했을까.’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20대 여성이 써온 글의 제목이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랐다. 집은 늘 서늘했다. 친구의 엄마들처럼 집안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 입시 전형에 같이 머리 맞대주길 바랐기에, 그렇지 않은 엄마를 원망했다. 우연히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를 읽었고 엄마의 입장과 처지에서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됐다. 엄마도 아빠처럼 직장에 다녔는데 집안일, 자식 돌보는 일을 ‘의심 없이’ 엄마의 몫으로 여긴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이었다.

 

각각 등장인물의 입장이 잘 드러난 좋은 글이었다. 딸이 느꼈을 서운함도, 엄마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도,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위치도 이해가 갔다. 악인은 없지만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구조의 문제에 눈 돌리게 된다. 그 글은 엄마의 노동이, 자식이 성인이 되도록 모를 만큼 공적으로 논의되지 못했음을 상기시켰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자기 관계를 돌아보게 했다. 그는 수업 마지막 날 내게 손편지를 건넸다.

 

“지금까지 제 글이 이상하고 못났던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어요. 필사를 하지 않아서, 단어를 많이 몰라서, 독서량이 부족해서.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서였어요.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고독과 외로움이 괴로워서. 그럴 때 늘 찾았던 친구들, 드라마, 영화, 책이 문제였어요. 나 자신과 생각보다 서먹한 사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귀한 깨우침이 담긴 고백이다. 나는 수업과 강연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 아니 자기-삶을 진득하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래 본 적이 없어서인 것 같다. 한국에서 입시제도 위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에게 글쓰기란 남에게 평가받는 일이다. 출제자 의도에 부합하는 표준화된 ‘답’을 찾다 보니 자기로부터 멀어지고 남의 사고에 집중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게 된다.

 

“어떻게 쓰면 ‘좋은 점수를 받을까?’ 하는 것만 신경 씁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말’과 어떻게 맞닥뜨릴까, 자신의 고유한 문체를 어떻게 발견할까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21쪽)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에서 사람들이 글을 쓰는 동기 자체가 망가져 있다고 진단한다. 일본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모양이다. 자기 경험과 감정은 뒷전이고 더 많은 지식, 더 인상 깊은 표현만 찾아 전전하니까 글쓰기는 점점 억지스럽고 고역스러운 일이 된다. 오죽하면 자기소개서의 줄임말인 자소서를 ‘자소설’이라고 할까 싶다. 그러나 글쓰기는 창작이나 발명이라기보다 발견에 가깝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48쪽) “미리 어떤 것을 써야지 생각하고 머릿속에 준비해둔 원고를 ‘프린트아웃’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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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글쓰기를 시작하는 용기, 그리고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밀고 나가기”(32쪽) 그래야 글쓰기에 힘이 붙고 논의가 섬세해지면서 자기 고유한 목소리가 나온다. 엄마에 관한 글쓴이의 고백처럼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 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 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311쪽)진다.

 

일전에 어느 강연에서 한 여성이 물었다. 내가 ‘엄마’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혹시 엄마로서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해달라는 거다. 애들이 커가는데 워킹맘으로서 고민이 크다고 했다. 육아에 정답은 없다는 전제하에, 나는 그냥 내 경험을 들려주었다. 딱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 챙겼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당시 나의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 상황에 해당하는 거라고 못 박았다.

 

그 질문한 여성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난 생각했다. 얼마나 멋진 문제 설정인가. 엄마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정리한다는 건. 이 세상에는 온통 이렇게 키워라, 저렇게 해줘라. 좋은 엄마라면 명심하라는 소위 전문가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떠다니는데, 그것은 한 개인의 구체적인 처지를 감안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육아 지침은 그 자체로는 온당한 말이지만, 엄마가 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지침이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누구보다 육아서에 의지했고 도움을 받은 면도 있지만 읽을수록 위축됐던 것도 사실이다. 이상은 고고하고 현실은 남루하니 부족한 엄마라는 자책이 들었다. 외려 육아서를 덮고 엄마 노릇에 대해 정리하고, 좋은 엄마란 무엇인가 글을 쓰면서부터 아이에게 화를 덜 내고 더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뭐 대단한 깨침을 얻어서는 아니다. 글을 쓰는 동안은 자신에게 집중하니까 자동으로 아이에게 무심해질 수 있었던 것뿐이다.

 

‘나는 왜 엄마만 미워했을까’ 글을 쓰는 딸이 어딘가에 있고, 다른 한쪽에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만의 육아법을 설계하는 엄마가 있다. 저마다 속상하고 답답할 때마다 한줄 한줄 길어 올린 글쓰기로 자기 언어를 만들어가는 풍경을 그려본다. 그럴 때 존재를 옥죄는 말들이 “인정과 도리에 맞는 언어”로 교체되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질 거란 믿음이 내겐 있다. “그것은 채점자 앞에 제출한 ‘답안’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303쪽)일 것이다.

 


그동안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을 사랑해주신 <채널예스>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채널예스 -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은유칼럼]

군에 간 아이가 휴가를 나왔다가 들어간 다음 날, 빨래를 개키다가 멈칫했다. 아이가 입던 양말이랑 팬티가 손에 잡혔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옷가지만 남아 있는 게 영 이상했다. 당분간이겠지만 임자 없는 옷들.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최초의 빨래’를 생각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처음 돌아간 세탁기에서 나왔을 옷들. 아이가 수학여행 가기 전 벗어놓은 허물들. 그것을 빨고 말리고 개켜도 입을 사람이 더는 없음을 알았을 때, 참사 이전의 일상을 완강하게 간직한 그 옷들은 다시 젖어가지 않았을까.


살다가 슬퍼지는 순간이면 자동 연상처럼 세월호가 떠오른다. 정확하게는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집 『금요일엔 돌아오렴』의 문장들이 생각난다. 내 평생 목도한 비참의 총화, 그 불가해한 사건의 실체를 나는 이 책으로 이해했다. 번호가 매겨진 희생자가 아닌 한 명 한 명 아이들이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었다는 건 어떻게 실감하는지, 슬픔이 정수리까지 꽉 찬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얼마나 휘청이는지, 대체 어떤 사건이 일어난 건지 부모들은 소상히 들려준다.


“전화로 미지 엄마한테 속옷서부터 팬티까지 얘기했지. ‘겉옷은 무슨 색인데 이게 맞냐’ 그랬더니 ‘맞다’. ‘속옷은 땡땡이 입었는데 이거 맞냐’, ‘맞다’. ‘팬티는 줄무늬에 뭐가 있는데 맞냐’, ‘맞다’”(54쪽) 미지 아버지 유해종 씨는 사고 한 달 만에 속옷 무늬로 딸의 시신을 찾는다. 죽은 아이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 무늬도 색깔도 크기도 제각각인 속옷은 아이의 몸과 취향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표지이자 엄마와의 내밀한 연결을 매개하는 유품이 된다. 아마도 미지 어머니는 일 인 분만큼 줄어든 빨랫감에서, 보이지 않는 땡땡이 무늬의 속옷에서 딸의 부재를 두고두고 실감할 것이다.


소연 아버지 김진철 씨는 아이가 세 살 때부터 “도둑질만 안 하고” 다 해가며 홀로 아이를 키운 한 부모 가장이다. 세상에 딸하고 나 둘만 남겨졌는데 잃은 그 아이, 딸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왔을 때 소포가 와 있었다. “풀어보니 소연이가 인터넷으로 산 책들인듸 소설책과 참고서였어유. 그걸 보고 엄청 울었네요. 그 책들을 샀을 때는 열심히 살려고 그런 거 아니여유. 근디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겄시유.”(96쪽) 


그 책들은 결국 딸의 친한 친구에게 주었다고 나온다. 짧게 언급된 한 줄 문장. 나는 그 행간에 오래 머물렀다. 너무 빨리 간 아이의 너무 늦게 도착한 책들을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책들을 건네주고, 살아 있는 딸의 친구를 보면서 부러움에 눈물짓고 소주를 들이켜다 쓰러져 잠들었을 아버지의 동선을 끝말잇기 하듯이 더듬더듬 그려보았다. 유통기한 없는 슬픔의 효소는 얼마나 오래 아버지의 술잔을 채웠을까.


“애가 좋은 데 간다”는 스님의 조언에 따라 호성 어머니 정부자 씨는 아이의 노트며 가방을 그대로 태웠다. 그런데 신발은 아이가 수학여행에 다 신고 가버리는 바람에 남은 게 없었다. “없어서 하나 사서 태워줬다.”(126쪽) 왜 그리 구질구질하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엄마는 가슴을 친다. 죽은 아이의 신발을 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사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난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슬픔은 이토록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고 성가시고 집요하고 난데없다. 예습과 추론이 불가능하고 복습과 암기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다.


나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글쓰기 수업 교재로 자주 쓴다. 한국사회 모순과 부조리를 보여주는 사회학 교과서이자, 삶을 질문하게 하는 철학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다루는 문학 작품으로 더없다. 이 책을 언급하면 거의 똑같은 반응이 나온다. 사놓고 엄두가 나지 않아 ‘아직’ 안 읽었다며 뒷걸음질 친다. 용기 내어 읽고 나면 눈빛이 단단해진다. 어떤 학인은 이렇게 썼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전혀 알려고도, 소통하려고도 하지 않은 무소통‧불통의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대로 믿어왔고 세월호를 인양하는 것이 국세 낭비라고만 생각했었다. 이미 떠나간 아이들이 뭐 건진다고 달라질까? 아이를 잃은 슬픔이 어떤 건지 아이를 기르고 있는 입장에서도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평범한 사람들의 각성과 저항의 서사로 빛난다. “아이랑 함께 했던 공간과 시간을 아이 없이 모두 다 새로 시작해야 한다”(213쪽)는 사실에 인생 초보가 된 사람들. 행동 양식의 초기화는 의식화로 이어진다. 세월호 사건이 “동네 저수지에 사람 하나 빠졌을 때보다 못하다”(291쪽)는 사실을 알아챈다. “뉴스가 진실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26쪽) 물론 “처음부터 투사가 되어 이걸 밝히고 말거야라는 생각으로 뛰어든 부모는 한 명도 없다.”(157쪽) 


        제훈 어머니 이지연 씨는 교육열 높은 엄마였다. 아이의 뇌기능에 좋게 모차르트 음악을 틀어주고 영어를 일찍 접하게 하고 학원 스케줄을 관리했다. 저만 삐뚤어지지 않고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한참 슬픔에 젖어 있던 무렵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딸과 아들을 잃은 부모를 만났고 위로를 받았다며 말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껴안는다는 거 그전에는 전혀 생각 못했어요.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모른 체하고 살았던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329쪽)


         전국으로 간담회를 다니는 세희 아버지 임종호 씨는 “우리 자식 물에 빠져죽지 않게 수영 가르쳤다”는 학부모들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깝다. “개인이 노력해서 수영 잘 해서 될 게 아니잖아. 왜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지 말하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자식 일이라고 생각 안 해요. 소를 잃어본 사람이 외양간을 고치지, 소가 멀쩡하게 있는 사람은 모르더라고.”(276쪽)


         얼마 전 인천에서 여덟 살 아이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아이가 친구와 놀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빌리러 한 여성을 따라간 뒤 봉변을 당했다. 엄마들 사이에서 충격이 컸고, 아이에게 핸드폰을 사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젊은 엄마에게 난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권했다.


나는 과연 소가 멀쩡하게 있는 사람인지, 멀쩡함의 기준이 되는 시기와 조건은 무엇인지,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자기 욕망과 세계관에 질문을 던지는 책. 핸드폰을 지니거나 생존 수영을 배우기처럼 내 자식만을 위해서는 내 자식을 위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책.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는 게 자기 슬픔과 불안을 직시하고 외양간을 고치는 일의 시작이 되리라 믿는다.


* 채널예스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