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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01] 헌책들 / 이영광 (6)

헌책들 / 이영광

[올드걸의시집]

 

원수의 멸망을 보려거든 그가 늙을 때까지 기다려라

늙으면 필연코 추해진다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시든 주름들과

힘 빠져 늘어진 뱃가죽,

저 웅크린 매음녀의 짧은 한평생을

보라, 침처럼 흘러내리는 중얼거림이

그 옛날의 흔해빠진 사랑의 고백이거나

노골적인 호객의 대사임을 듣고

그대는 놀라리라,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생이

늦은 11월, 떨어져 비 젖은 나뭇잎과

쓰레기를 닮아간다는 사실,

문득 술 취한 어느 손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물러설 때도

희마하게 그 어둔 눈빛 반짝인다는 사실,

이 거리의 어느 누구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팔리기를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늙음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그녀의 늙음은 너무 쉽게 노출된다

상처를 이루지 못한 비싼 사랑의 흔적들이

정액처럼 표지 위에 얼룩져 있다

 

신간 코너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로,

재고 도서로 쌓였다가 다시 무수한 손을 거쳐

지루한 세일 기간 동안 싸구려로

드디어 제값으로 팔리기 위해 나와 앉은 헌책들

 

 

- 이영광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창작과비평사

 

 

 

'청춘은 빨리 깔깔 웃고 빨리 눈물을 흘린다. 청춘은 빨리 용기를 내고 빨리 공포스러워 한다...청춘은 빨리 참여하고 빨리 이탈한다.'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도올의 책을 넘기다가 눈이 멈춘 부분이다. 저 구절을 보고 나 청춘인가? 했다. 별일 아닌 일에도 혼자 웃기도 잘 웃고 눈물도 펑펑 잘도 쏟아진다. 한번 해보자 덤볐다가 기겁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빨리 참여하고 빨리 이탈한다'는 부분이 와닿았다. 나, 지금 하는 일을 내던지고 이탈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시구를 친구한테 보여주었더니 무엇에 '공포'를 느끼느냐고 물었다. 얼른 대답했다. 공문서. 라고. 지난 3개월 동안 하루 종일 문서와 대면했다. 그 결과 나는 지금 도큐멘트 포비아가 되어버렸다. 폰트 12에 헤드라인 서체에 막대기같은 문투로 용건만 간단히 나열된 그 문서는, 조금도 날 유혹하지 않는다. 밀어낸다. 어디에 정을 붙여야할지 모르겠다.  

 

토요일 시세미나에서 '헌책들'을 읽고 나 늙은인가? 했다. 일을 하지 않고 일에 대해서 판단만 하고 있다. 난 그것을 늙음의 징조로 본다. 살지 않고 삶을 판단하는 것. 자판기처럼 문서든 책이든 말이든 넣으면 글을 뽑아냈는데 이제 그 생산 능력이 마비된 것인지, 이번이 예외적인 경우인지 알 수 없으나, 업무성과보다 불평불만이 쌓여가는 작금의 상태는 낯설고 난감하다. 고용형태에 대한 부당함도 견디기 힘들다. 정식 고용계약을 하면 실수령액이 더 작아지니까 더 많은 급여를 쳐주기 위해 편법인데 원고료 개념으로 매달 일정액을 받는다. 나를 위한 배려이고 나도 동의했는데 막상 일하는데 그 시스템이 질곡처럼 느껴진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하던 일은 마무리하고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고 한달이 남았는데, 그 한달 동안 나를 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동시킬 생각하니 비참했다.

 

어제 퇴근 길에 선배가 '낼 아침에 업무 얘기 좀 하자'고 했다. 그 때 "못하겠다"고 얘기를 해야하나 아침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한 시간 내내 고민했다.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다가 또 청춘의 징조인지 청승의 징후인지 모를 눈물이 왈칵 흘렀다. 뭐냐면, 나는 그동안 살면서 너무 참지 말아야 할 일까지 잘 참은 것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후회, 자조, 원망으로 생각이 번졌다. 감정이 커져서 급기야는 그간 살아온 생에 대한 자기연민이 밀려왔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알고 보자보자 하면 보자기로 안다고, 내가 모든 것을 다 견디고 참고 꿋꿋하고 씩씩하고 태연하게 가정생활을 영위해나가는 게 어쩌면 내가 파놓은 함정이 된 것 같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참지 못할 일과 참을 일을 분간하는 기능이 퇴화버렸는지도 모른다. 왕상무 승무원 폭행 사건을 계기로 나오는 온갖 사례들을 보면, 그간 노동자들이 참 무던히 눈 감고 귀 닫고 입 닫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놈의 먹고사니즘 때문에.

 

아침에 선배와의 미팅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마쳐야지 싶어서 잘 마무리해보겠다고 대답했다가, 사무실에서 하루종일 고민하다가 선배한테 편지를 썼다. 일필휘지로. 일종의 항복문서였다.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글쓰기 능력이 장착되어 있어 금방망이처럼 뚝딱하면 책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고 선배도 생각하고 저도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노동력과 가시적 성과물의 즉물적인 교환을 이렇게 실시간으로 자각해야 하는 게 너무 자본주의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엉성한 고용방식 때문에 내가 임노동자도 아니고 부속품 같다는 자괴감이 든다, 짐도 덜어드리고 일도 배우고 돈도 벌려는 애당초 기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써놓고 보내기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임시저장' 해놓았다. 노동절 하루, 나의 노동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시세미나에서 '헌책들'이 창녀 비하하는 시 같다는 얘기가 나왔다. 평소 과묵하던 한 친구가 반론했다. "전산 전공을 살려서 프리랜서로 일할 때 여기 가라면 여기 가고 저기 가라면 저기 가서 일 해주고 오는데, 내가 몸 파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창녀의 직업과 크게 다른 노동을 한다는 생각을 갖기 어려웠다"고 했다. 일순 침묵이 흘렀다.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생. 이라는 대목에선 우리들은 저마다의 처지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을 사고 파는 일의 쓸쓸함은 정녕 피할 수 없는가. 분업화되고 파편화되는 삶의 양식에, 합리성과 효율성과 생산성에 저항해야지, 이 야만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길들여지지 말아야지, 팔 때 팔더라도 알고 팔려야지. 팔리기를 포기하지 못하면서 버둥거리는 노동절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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