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우리시대 이데올로기의 실재들

[비포선셋책방]

라캉의 실재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재에 관한 정의는 흡사 선문답을 연상시킨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선문답은 쉽고 간결하고 명확하나 깨닫지 못한 입장에선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실재는 관성적인 현존, 실정성의 충만, 상징적 질서 한가운데에 뚫린 구멍, 간극이다. 실재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견고하고 꿰뚫을 수 없는 중핵. 그 자체로는 아무런 존재론적인 일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기괴한 순수 실체이다. 등등. 실재는 단단한 덩어리이면서 구멍이고 현존하면서 선행한다. 라캉(지젝)에게 이데올로기는 환상이고 이 세계를 이루는 상징질서이다.  실재는 환상 가로지르기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박정수의 분석을 참조해 우리시대 이데올로기의 실재들을 살펴보자.

* 파시즘의 실재

파시즘의 인간관계는 고문자와 피고문자처럼 물리적 힘(폭력)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여기에는 계약이라든가 교환같은 시장의 공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오직 힘만이 주인과 노예를 결정짓는 변수이다. 파시즘은 주로 남자다운 군인정신으로 표출된다. 교사와 학생, 가부장적 아버지와 자식, 때로는 연인관계에서도 ‘힘’으로 관계를 제압하려는 시도들은 종종 발견된다. 파시즘을 행사하는 이들은 왜소한 자아를 갖고 있다. 타자의 존재와 노예의 인정에 의존해서만 쾌락을 생산한다. 즉, 타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가련한 노예다. 자기 스스로는 어떤 자존감도 느끼지 못하는 이 작은 인간들은 ‘가족’이나 ‘군대’ ‘민족’ ‘국가’라는 더 큰 ‘나’의 집단 동일성 속에서만 자긍심을 찾는다.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이들, 혼자서는 못 노는 '다 큰 어린애들'의 과장된 위안처다. 파시즘은 자본의 시장논리가 아니라 국가라는 폭력장치를 이용하여 시장을 장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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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비포선셋책방]

알튀세르는 구조주의적 경향을 띈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평가받는다. 정신분석학에서 원용한 중층 결정(혹은 과잉결정) 또는 구조적 인과성 이라고 하는 개념에 기초하여,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의 일원적인 토대- 상부구조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정신분석은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정신분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막연히 짐작 가능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된 모성이 홧병으로 나타나는 것, 유아 때부터 사교육 쓰나미에 휘말리던 동심들이 학습장애를 일으키는 것 등의 사례는 ‘정신분석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정신병원이 혁명의 공간이어야 하는 이유가 거듭 확인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정리해보자면, 이데올로기는 메타적인 개념이다. 관념들의 다발 자체가 아니라 관념들의 발생기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관념체계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관념의 외부적 생성원인을 은폐함으로써 현실구성 기능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념의 외부적 발생원인과 기능을 비판할 때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작동을 멈춘다. 정신분석은 의욕이나 욕구, 의도와 목적의 복합체인 표상 형태들의 발생기원을 보편적 감각의 질서(외디푸스콤플렉스)로 환원한다. 정신분석은 신경증 환자의 이데올로기, 즉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의 발생기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념의 원인과 기능을 드러냄으로써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이데올로기 비판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적 감각표상을 생성하는 신체의 욕망의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다. 예를 들어 ‘나 명품이 좋아’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명품에 대한 욕구의 발생기원에 대한 관념, ‘그건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각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다. 허위의식의 물질적 기능을 밝힘으로써 어떤 물질적 효과 (신체적 변이)를 기획하는 것이 유물론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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