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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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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 유하 풍뎅이가 방충망을 온몸으로 들이받으며 징허게 징징거린다 (난 그의 집착이 부담스럽다) 나도 그대 눈빛의 방충망에 마음을 부딪치며 그렇게 징징거린 적이 있다 이 형광등 불빛의 눈부심은 어둠 속 풍뎅이를 살게 하는 희망? (글세, 희망이란 말에 대하여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그가 속삭인다) 그 무엇보다도, 징징대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풍뎅이는 벌써 풍뎅이의 삶을 버렸으리 - 유하 시집 , 문학과지성사 아들이 졸업했다. 졸업식 전날, 아들의 등짝을 두드리며 치하했다. “욕봤다. 중학교 3년을 무탈하게 마쳐 다행이구나.” “앞으로 3년 동안 더 힘들 텐데요.” “아들, 공부가 고생스럽지?” “뭐...” “주변에 이십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라. 엄마가 차려주는 밥 먹고 정해진 과목 공부할 그 때가..
사랑의 편지 / 유하 - 빛을 구할 데는 마음밖에 없나니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7 어둔 밤, 페달을 돌려 자전거 전등을 밝히고 사랑의 편지를 읽는 사람아 그 간절함의 향기는 온 땅에 가득하기를 사랑은 늘 고통을 페달 돌려 자기를 불 밝힌다 자전거의 길을 따라 어떤 이는 와서 그 빛으로 인생을 읽고 가기도 하고 구원을 읽고 가기도 한다 그대, 부디 자전거가 가는 길로 사랑의 편지를 부쳐다오 세상의 유전이 다하고 암흑이 온다 해도 빛을 구할 데는 마음밖에 없나니 나는 나를 불 밝혀 그대 편지를 읽으리라 - 유하 시집, 중에서 '내 설움에 겨워서 우는 거지 뭐. 죽은 사람 위해 우나'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절친 아줌마가 한없이 목놓아 울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막 울고 싶을 때 초상집에 가서 울고 오면 티도 안 나고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달의 몰락 / 유하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나는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 아래 집안 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시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 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 게 정말 사는 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 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아니 그 전락을 홀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충분히 외롭다 하지만 난 편입의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 난 집 밖으로 나간다 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그 쓸모 없음에 대한 사랑이 나를 시 쓰게 한다 그로므로 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호의보다는 날 전혀 읽어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