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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03]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 안도현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5)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 안도현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올드걸의시집]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 찬 고요 속에다 실금을 그어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 안도현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





뭇 남성동지들의 연인이 되어 독신으로 살 줄 알았던 선배다. 서른 중반에 같이 노동운동 하는 연하남이랑 결혼하고 아이없이 지냈다. 마흔이 넘으니 슬슬 아기가 눈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아기를 가지려니 생기지 않았다. 두 번의 유산. 언니가 '유산했다'고 전화한 날. 언니네 잠시 들렀는데 서랍장 위에 장난감 같은 아기신발이 놓여있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짠했다. 가끔 형부랑 같이 만나면 언니랑 나랑 편히 놀라고 형부가 내 딸아이를 데리고 가서 노는데, 자상한 아빠의 자리가 형부한테 너무 잘 어울려서 또 애틋했다. 불임부부가 그렇듯이 제일병원으로 경희한방병원으로 좋다는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아기 소식이 없었다. 언니가 '마흔 넘어 애 가지려니 힘들다'며 푸념했다. '내가 너무 놀았나봐. 젊을 때 뭐하고 나이들어 이 고생인지'라며 한숨지었다. '놀긴. 이 때까지 운동판에서 고생만 했지.' 임신준비를 위해 한동안 술을 끊었던 언니가 '에라 모르겠다'며 밤문화 친교활동을 재개하는 등 아기를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살살 댈래 꼬셨다. '언니, 딱 올해까지만 노력해보자. 그래야 후회가 없지.'  

선배의 차를 탔다. 반나절의 짧은 여행. 목동에서 성남까지, 마실삼아 친구의 약국에 가는 길이다. 옆모습은 원래 앞모습보다 슬퍼보이나 보다. 원래도 말랐는데 뺨이 더 야위었다. 언니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스물 두살 철 없을 때 노조에서 만난 언니는 외부에서 유입된 연맹의 편집장이었다. 나의 첫 데스크였다. 내가 쓴 인터뷰기사가 좋다고 그 때부터 인터뷰만 시켰다. 그 후로 거의 이십년간 인생의 중요한 국면을 함께 하고 내가 벼랑 끝에 설 때마다 동아줄이 되어주었다. 그런 선배에게 나는 아무 것도 해준 게 없었다. 언니의 친정엄마가 삼십대 중반에 돌아가셨는데 아마 친정엄마가 계셨으면 언니의 임신을 더 적극적으로 서둘러 성사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생각을 하니까 또 언니가 외로워보였다. 불임부부 지원자격이 되는 가난한 노동운동가 부부인 것도 가슴 아팠다. 나의 마음자락이라도 덧대면 그렇게 마음과 마음을 포개면 자궁도 따뜻해지고 아기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한약 지으러 가자고 했다. 내 친구는 영혼까지 돌보는 그 어떤 한의사보다 훌륭한 약사라고 소개하면서.

평일 오전의 한산한 올림픽대로를 달리는데 윤도현의 노래가 나왔다. 처음엔 라디오인줄 알았는데 계속 윤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도현 음반 샀어?' '응' 언니는 말했다. "지난번 민주노총 문화제에 윤도현이 나왔는데 안쓰러워서 혼났다. 자기 홈페이지에 소감도 써주고 격려해달라고 하더라. 윤도현이 러브레터에서 짤리고 그렇게 불이익 당하는 게 웬만한 심지 아니면 정말 힘들고 정신적 타격이 클거야. 우리가 힘이 되고 지켜줘야지. 그래서 난 선물할 일 있으면 무조건 윤도현 씨디야. 너도 서태지 그만 찾고 윤도현도 좀 좋아해줘라. 공연보고 나면 홈페이지에 격려글도 쓰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 눈을 맡겨 둔다. 윤도현에게 귀를 맡겨 두고 그의 젖은 목소리를 듣는다. 오도카니 모은 그의 젖은 무릎을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들이 아니런가... 어젠 서점에 갔다가 진중권 씨 책을 한 권 사왔다. 대학에서 쫓겨나고 허망함에 시달릴 그를 생각했다.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밖에 꺼내지 않고, 애닯은 책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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