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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23] 시체 / 보들레르 (14)

시체 / 보들레르

[올드걸의시집]


기억해보아라
, 님이여, 우리가 보았던 것을,
그토록 화창하고 아름답던 여름 아침
:
오솔길 모퉁이 조약돌 깔린 자리 위에
드러누워 있던 끔찍한 시체 

음탕한 계집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독기를 뿜어내며 불타오르고
,
태평하고 파렴치하게,
썩은
냄새 가득 풍기는 배때기를 벌리고 있었다 

태양은 이 썩은시체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알맞게 굽기라도 하려는 듯
,
위대한 자연
이 한데 합쳐놓은 것을
백 갑절로 모두 되돌려주려는 듯;

하늘은 이 눈부신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꽃이라도 바라보듯
.
고약한 냄새 어찌나 지독하던지 당신은
풀 위에서 기절할 뻔했었지. 

그 썩은 배때기 위로 파리떼는 윙윙거리고,
거기서 검은 구더기떼 기어나와
,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
그 살아있는 누더기를 타고,

그 모든 것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밀려나갔다 하고,
그 모든 것이 반짝반짝 솟아나오고 있었다
;
시체는 희미한 바람에 부풀어 올라
,
아직도 살아서 불어나는 듯했다.

그리고 세상은 기이한 음악소리를 내고 있었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
또는 장단 맞춰 까불거리는 키 속에서
흔들리고 나뒹구는 곡식알처럼.

형상은 지워지고, 이제 한갓 사라진 꿈,
잊혀진 화포 위에
화가가 기억을 더듬어 완성하는
서서히 그려지는 하나의 소묘. 

바위 뒤에서 초조한 암캐 한 마리
성난 눈으로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
놓쳐버린 살점을 해골로부터
다시 뜯어낼 순간을 노리며,

-허나 언제인가는 당신도 닮게 되겠지,
이 오물, 이 지독한 부패물을
,
내 눈의 별이여, 내 마음의 태양이여
,
내 천사, 내 정열인 당신도!

그렇다! 당신도 그렇게 되겠지, 오 매력의 여왕이여,
종부성사 끝나고
당신도 만발한 꽃들과 풀 아래
해골 사이에서 곰팡이 슬 즈음이면,

그때엔, 오 나의 미녀여, 말하오,
당신을 핥으며 파먹을 구더기에게
,
썩어문드러져도 내 사랑의 형태와 거룩한 본질을
내가 간직하고 있었다고!

 

- 보들레르시집 <악의 꽃>, 대산세계문학총서 

 

오전 1130분 망원동 작은 사거리 빵집 앞. 약속한 사람을 기다렸다. 5분이 지났는데 오지 않았다. 빵집에서 커피를 시켜 들고 골목 안쪽 주택가 방향으로 몇 걸음 들어갔다. 조금 높은 보도블럭에 앉았다. 커피와 가방을 옆에 놓고 책을 꺼냈다. 길거리 카페. 오랜만에 보는 보들레르. 오규원을 읽다가 보들레르로 시심이 번졌다. 햇살도 바람도 다사로운 가을 아침. 마음이 간지러워 집중이 안 됐다. 시 한줄 허공 한줄 커피 한 입 시계 한 번. 두리번거리는데 멀리서 노파가 나타났다. 아흔 쯤 되어 보이는 진짜 할머니. 머리는 새하얗고, 몸은 뻥튀기처럼 푸석푸석했다. 느릿느릿 오초에 한 걸음씩 내딛는다. 지상의 무대에는 할머니와 나만 존재했다.

점점 내게로 다가오는 형상. 하늘은 이 눈부신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꽃이라도 바라보듯,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꿈속에서 저승사자를 보았을 때처럼, 피할 수 없으리란 예감에 사로잡혔다. 분명 할 말 있는 표정이다. 책으로 눈을 피했다가 고개를 드니 할머니가 코앞. 예상대로 기어이 입을 떼신다. “눈 밝아 좋겠다! 나는 암 것도 안 봬. 보고 싶어도 못 봐. 눈 밝아 좋겠다...” 단역배우 대사 치듯 웅얼웅얼 말을 던지고 지나간다. 시크하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할머니 손에 무언가 들려있다. 자세히 보니 손바닥보다 큰 낙엽 대여섯 장이다. 낙엽 쥐고 어디로 가시는 걸까. 육체의 전원이 하나씩 꺼져가는 몸뚱이. 지팡이가 아니라 낙엽에 기댄 할머니. 사라지는 뒷등이 말한다. 썩어문드러져도 내 사랑의 형태와 거룩한 본질을 간직하고 있다고 

돈암시장. 이불가게 주인 아주머니-할머니는 볼 때마다 누워계신다. 이불은 하루에 몇 채나 팔릴까 걱정하며 지나간다. 이불가게는 최적의 숙면 환경. 전국 재래시장의 모든 이불가게의 아주머니는 가로로 누워있다고 상상한다. 오늘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속옷가게 양품점 주인아주머니-할머니도 누워계신다. 스타킹 사려고 유심히 살펴봤다. 잠옷, 내복, 양말 파는 집을 발견했다. 아무도 안 계세요. 안쪽에 들어갔더니 아주머니가 벌떡 직각으로 일어난다. 파마머리가 납작하게 눌렸다. 스타킹 있어요? 발목까지 오는. 있지. 여기. 얼마에요. 오백..천원이야. 신앙촌 꺼라 좀 비싸. 천원이야 천원. 구멍도 안 나고 좋아 

양말을 계산하고는 나도 모르게 툇마루에 털썩 앉았다. 할머니 신고 가도 되죠? 스타킹을 안 신었더니 발이 아파서요. , 스타킹을 왜 안 신었어! 맨발에 구두 신으면 구두가 발을 파먹지. 나도 옛날에 강남에 나갈 때 구두 신고 나갔다가 벗어서 들고 오고 그랬어. 구두가 발을 파먹는다고 파먹어! 할머니가 보들레르다. 어떻게 구두가 발을 파먹는다는 표현을 쓰실까. 적확하고 독창적인 언어구사에 감탄한다. 구두신고 멋부리고 강남에는 어떤 일로 가셨을까 궁금하다. 근데 스타킹 색이 좀 밝다. 코티 분가루 같은 신앙촌 스타킹. 발에 끼우니 뿌옇게 발이 부푼다. 면양말처럼 투박하다. 까만 구두를 신으니 더 촌스럽다. 비비안 스킨칼라와는 채도와 질감이 완전 다르구나. 어찌하랴. 구두가 파먹은 발, 구더기칼라의 신앙촌 붕대로 감싼 발이 나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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