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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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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의 유혹 ‘너희들 나이도 어린데 대단하다 같은 말을 삼가 주세요.’ 얼마 전 청소년 대상 강의를 앞두고 몇 가지 당부가 적힌 메일이 왔다. 강사들에게 귀띔할 정도면 이런 일이 잦나 보다. 부끄럽지만 나도 전적이 있다.한 강연에서 그간 청소년을 만나면서 편견이 깨졌노라 고백하다가 그 문제적 발언, ‘청소년들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는 걸 지적받고 알았다. 한 청소년이 말했다. “만약에 은유 작가님께 누가 ‘여자가 이런 글도 쓰고 대단하다’는 말을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무안함에 ‘땀뻘뻘’ 상태가 된 나는 다른 섬세한 표현을 찾아보겠다며 사과했다. 며칠간 그 쓴소리가 웽웽거려 혼자 얼굴 붉어졌다. 맞는 말인데 ‘좀만 살살 말해주지’ 싶은 서운함이 들었지만, 청소년을 동료 시민으로 대하지 못하고 은근히 하대한 ..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 스마트폰에 카메라 앱을 깔았다. 셀카를 찍어보니 소문대로 신통했다. 주름 제거, 미백은 기본에 눈동자가 크고 또렷해졌다. 메이크업 기능이 내장된 듯 칙칙한 얼굴이 지중해 햇살 받은 해사한 분위기로 변모했다. 흡족함도 잠시, 곧 도덕 감정이 올라왔다. 이건 속임수이며 나 아닌 거 같다고 했더니 누군가 말했다. 오렌지 과즙 3%만 들어가도 오렌지주스라고 하는데 본래 얼굴 3%만 있으면 자기 얼굴 맞는다고. 나의 죄책감은 더 근원적인 부분에 닿아 있다. 일회용컵 사용을 줄이듯 외모에 대한 언급을 자중하고 싶었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일주일 살아보기’가 오랜 목표다. 이 슬로건은 2016년도에 여성민우회에서 진행한 캠페인으로 꾸밈 노동을 강요하고 외모중심주의를 부추기는 세태에 맞서는 실천으로 제시됐다. ..
우리가 한바탕 이별했을 때 마흔이 되자 친구들이 이혼하기 시작했다. 배우자가 무책임해서, 시댁이 무례해서, 같이 있기 싫어서 갈라선다고 했다. 남 일은 아니었다. 나도 한달간 떨어져 지냈다. 사람이 이토록 미워지는 마음이 참 낯설었는데, 내가 지은 밥을 그가 먹는 게 싫어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 결심했다. 소설가 위화는 책을 읽다가 재미없으면 덮는단다. 계속 읽으면서 작가를 미워하긴 싫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장 덮듯 나도 얼굴을 덮고 싶었다.‘한부모 여성 가장’이 된 친구들은 아이에게 이혼 알리기를 가장 어려워했다. 아이가 어릴수록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회사 일로 떨어져 지낸다, 아빠는 외국에 갔다는 철 지난 유행가 같은 이유를 둘러댔다. 결혼 10년간 한 번도 생활비를 준 적 없는 남편과 헤어진 선배는, 짐을 벗어버렸는데 생각..
서울, 패터슨의 가능성 평일 오후에 이런 적은 처음인데 싶어 연신 창밖으로 몸이 기울었다. 정류장이 코앞. 신호가 몇번 바뀌도록 버스가 꼼짝 못 하자 기사는 뒷문을 열어주었고 승객 서넛이 내렸다. 큰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정류장도 아닌 데 차를 세웠다며 뒷문 쪽에 웬 남자가 서서 목청을 높였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 줄 아느냐, 운전기사가 아무것도 모른다, 형편없는 사람이다, 라며 그는 술 취한 아버지처럼 한 말 또 하기 신공을 발휘하더니만 느닷없이 화제를 자신에게 돌렸다.“내가 말이야 모자 쓰고 잠바때기나 입고 있는 늙은이라고 날 무시해!” 짙은 밤색 모자와 남색 외투를 입은 행색은 단정하고 허리는 꼿꼿했다. 행동도 민첩했다. 핸드폰을 꺼내 차 문 위에 붙은 교통불편 신고 전화번호를 누르고 차량 번호, 위치, 신고 내..
읽고 쓰지 않을, 권리 사교육으로 유명한 지역에 강의를 갔다. 앞서 단체 대표가 교육 특구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인사말을 전하더니 여러분들이 글쓰기를 잘 배워두었다가 아이들에게도 알려주라며 자리를 떴다. 객석 대부분은 주부였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취지를 바로잡았다.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가르치지는 마세요. 엄마의 옷을 벗고 본연의 나로 사는 방편으로서 글쓰기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분이 손을 들었다. 6학년 아이에게 독서록을 쓰게 하는데 아이가 싫어한다며 무슨 방도가 없냐는 것이다. 엄마 모드는 웬만해선 해제되지 않는다. 아니다. 학부모만이 아니라 교사들도 읽기와 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골치라며 묘책을 묻곤 한다. 그럴 땐 되묻는다. 왜 아이들이 꼭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돌아오는 답은 ..
삶의창 - 화장하는 아이들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파우치를 꺼내놓고 입술연지를 바르거나 파우더를 두드린다. 헤어롤을 말고 있거나 셀카에 열중하는 아이도 보인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고등학생 30명이 모인 자리니까 시집이나 만년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 없지만, 책상을 점령한 의외의 사물에 놀란 건 사실. 이 신세계 구경에 어리둥절한 내게 담당 교사는 귀띔했다. 대다수 아이들을 ‘교칙 위반자’로 만들 수 없다는 교장의 용단에 따라 화장 금지 조항을 없앴다고. “아침에 화장 못 하고 출근하면 애들한테 빌려 써요” 하며 웃는다. 비슷한 시기에 대안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교사와 학생의 토론 끝에 교내 화장 금지로 결정이 났단다. 화장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대립 관계가 아니다, 화장을 하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 기분이 좋다..
레즈비언 부부와 놀다 여자 다섯이 짧은 여행을 갔다. 나이는 삼사십대. 농부, 활동가, 직장인, 백수 등 하는 일도 제각각. 레즈비언 부부와 이성애자 셋. 이성애자들 중 둘은 기혼, 하나는 비혼이다. 아무래도 커플이 있다 보니 중심이 그들에게 쏠렸다. 서로 자기가 맞다고 티격태격할 때는 여느 부부 같았고 손잡고 걷는 모습에선 흔한 연인이 떠올랐다. 아득한 바다보다 다정한 사람 풍경에 눈이 시렸다. 곤한 일정을 마친 밤, 술이 한 순배 돌자 사랑 얘기가 나왔다. 둘이 어떻게 처음 만났어요? 아직 연애의 꿈이 짱짱한 비혼 친구가 물었다. 십년 전 모임에서 봤어. 사람들이 스무명 정도 있는데 눈에 띄더라고. 어떤 점이? 얼굴이 동그랗고 예뻐서. 세상일에 관심이 많고 사고가 유연했어. 2차는 우리끼리 따로 가자고 했지. 얘기가 잘 ..
어른들의 말하기 공부 새봄 새 학기, 급식 메뉴도 맛있고 문화체험 행사도 많아 기대에 들뜬 소년은 선생님의 다급한 부름을 받는다. 엄마의 부고 소식이다. 교통사고로 엄마를 떠나보낸 때가 열다섯.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나이가 있진 않겠으나 검은 상복이 안 어울리는 연령대는 있다. 그 소년은 스물한살이 되어 그날의 상황과 심정을 글쓰기로 풀어냈고, 어린 상주에게 감정이 이입된 동료들은 숨죽였다. 얼마 전 글쓰기 수업 장면이다. 그가 낭독을 마치자 예의 침묵이 한동안 감돌았다. 합평은 늘 긴장된다. 이런 경우처럼 상실 경험이라면 더하다. 글이 묵직하니 말이 더디 터진다. 적절한 위로와 지적의 말을 찾느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불쑥 삐져나온 자기 기억과 대면하느라 저마다 머릿속이 바쁘기도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