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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26] 본분과 전혜린

본분과 전혜린

[은유칼럼]


‘본분’이라는 말, 이 쿰쿰한 냄새 피우는 단어의 옷을 공교롭게도 ‘여자 아이돌’이 입고 나타났다. 설 연휴에 KBS 2TV에서 ‘본분 금메달’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됐고 제목 그대로 누가 더 여자 아이돌의 본분에 맞는가를 겨루었다. 가령 모형 바퀴벌레를 던져놓고 얼마나 예쁘게 놀라는지,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도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는지, 프로필상 몸무게와 실제 몸무게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등의 테스트를 거친 후 총점을 매겨 무슨 올림픽처럼 금메달을 수여했다. 방영 후 ‘아이돌 괴롭히기’라는 논란이 일고 ‘눈살 찌푸리게 한다’는 시청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럴 만했다. 본분本分. 본래의 직분에 따른 책임이나 의무를 진다는 뜻이다. 이 행실 바른 말의 숨은 폭력성을 저 프로그램은 여실히 드러냈다. 학생의 본분 하면 공부, 여자의 본분 하면 조신하게 살림하고 애키우기를 떠올리는 건 나뿐인가? 대개 본분이란 약자의 (동의 없이 정해진) 의무이고 그 본분은 약자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가 정한다. 아이돌의 본분 역시 방송 권력이 급조했다. 위 프로그램을 만든 최승희 PD는 프로그램 제목인 아이돌의 '본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남의 삶의 의무를 내가 정한다는 발상 자체는 얼마나 위험한가. 이 가학의 놀이가 공공연히 공중파 프로그램으로 제작 유통되는 시스템이 나는 끔찍하다. 

사람 사이 위계를 전제한 ‘본분’이라는 봉건적 언어와 ‘금메달’이라는 경쟁지상주의를 접목해 프로그램 제목을 짓는 천박함이,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이미지 관리가 가능할지 바로 확인 들어갑니다’라는 자막을 넣는 오만함이, “어떤 상황에서도 웃어야하는 아이돌의 숙명”을 보여주겠다는 제작진의 인권 감수성의 무감각이, 시청률을 내기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는” 그 성실한 임무 의식이 무섭다. 이렇듯 개인의 존엄을 간단히 몰수하는 나쁜 관념을 만드는 건 너무도 평범하게 굴러가는 저마다의 일상이다. 

본분은 질 나쁜 꿈처럼 여자의 삶에서 떨쳐지지 않는다. 아이돌 뿐이랴. 저 방송 제작진의 간파대로 본분의 명령이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일상에 불쾌하게 끼어드는 걸 나도 경험한다. 심지어 아이가 수능 시험을 보는 해에는 “고3 엄마가 엠티를 가느냐”는 등 '고3 엄마의 본분’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학생의 본분은 졸업이 있어도 여자의 본분은 졸업이 없다. 고3 엄마가 가야할 장소란 입시설명회나 절, 성당, 교회 같은 기도처라는 듯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 수능 시즌 언론 보도 영향이 클 것이다. 매체의 이미지는 그렇게 대중의 무의식이 된다. 

본분 금메달이 열리는 설 연휴에, 차례를 지낸 후 나는 제주도로 떠났다. 기름 냄새에 찌든 메스꺼운 기분이 아닌 옥빛 바다의 찬 공기를 쐬며 맑은 정신으로 명절을 보냈다. 결혼 후 처음 누리는 호사다. 며느리, 딸, 엄마, 아내의 본분을 벗어나 존재의 오롯함을 즐겼다. 바닷가 마을 작은 서점에 들렀다가 스무살의 내가 되어 전혜린의 에세이 <목마른 계절>을 집어들었고, 그 책에서 “여성의 가장 본질적인 약점으로 나는 생 전반에 대한 비본연적 태도를 들고 싶다”는 문장을 아프게 읽었다. 

비본연적 태도로 살아가길 강요 받는 이땅의 모든 본분 금메달의 출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전혜린은 이렇게 글을 매듭짓는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무서운 조건 하에 놓인 우리가 해야할 일은 (본분 수행이 아니라) “근본적인 생 감정에 지배된 생활”이어야 한다고.


*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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