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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나 리시차와 함께 한 일요일 오후

[차오르는말들]




Valentina Lisitsa -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월광 3악장

'소낙비를 맞고 나면 우산이 필요없지'  여고생 때 팬시노트를 모았다. 내 책상서랍은 메모지와 편지지까지 가을날 낙엽이 쌓인 곳간이었다. 만년필로다가 시집이나 책에서 본 아름다운 글귀를 옮겨적었는데 거기에 써 놓았던 문구다. 어린 나이에 왜 저 말이 좋았을까. 겉으론 얌전한 아이였지만 안으론 폭풍같은 삶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우산도 없이 소낙비를 맞으며 거리를 떠도는 장면은 노래방 뮤직비디오 배경화면으로도 쓰지 못할 삼류영상이겠지만, 가끔 꿈꾼다. 소낙비에 흠씬 젖은 나. 그러고 나면 마음에 풀썩이는 먼지가 싹 가라앉고 비갠 뒤 아침처럼 미풍 살랑이는 평화로운 날들이 펼쳐질 것같다. 그런데 원할 때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또 남의 시선이 중요하니까 현대인은 소낙비를 맞지 못해서 샤워기 아래에서 머리를 적신다. 몸이 젖으면 맘이 씻긴다는 게 신기하다. 육체와 정신은 상호 교통한다.

비는 하늘에서만 내리지 않는다. 피아노에서도 내린다. 그것을 입증해준 발렌티나 리시차의 폭풍연주.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77년 생. 강력한 힘과 엄청난 속도로 곡을 장악하는 그녀는 '피아노 검투사'란 재미난 별명을 지녔다. 연습량은 실력을 배반하지 않는 모양이다. 피아노와 그녀 사이의 거리를 전혀 느낄 수 없다. 베토벤의 열정과 고뇌를 그대로 흡수한 <월광> 3악장도 전율이 일지만 쇼팽의 <추격> 연주는 압권이다. 울 아들 왈, 엄마한테 잔소리 듣고나서 들으면 딱이라나 뭐라나. 특별히 야단치는 사람도 없는 난 지 혼자 야단치고 지 혼자 위로한다. 요즘따라 발렌티나 리시차가 꿀맛이다. 금기를 깨고 싶은 자들, 생의 이행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맞춤한 음악. 마치 니체를 읽는 기분과도 유사하다. 거침없고 격정적이다. 마음의 빗금을 넘어 일탈을 권한다.

새해 첫 일요일 오후, 나른한 가운데 책과 음악을 번갈아 뒤적이며 노닐고 있다. 딸내미는 목욕탕 가자고 하는데 소낙비 안을 선뜻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때 마침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을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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