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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다이어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밥이 있다

[은유칼럼]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아버지)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이웃 아줌마) 장례식으로 끝나는 수미쌍괄식 구성이다. 검은 상복의 여인 네 명이 주인공. 15년 전 집을 나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통해 만나게 된 이복 여동생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다. 바닷가 마을과 집이 주무대인데 잔멸치 덮밥, 카레 등 식사 장면이 많이 나와 군침을 돌게 하니 이 작품을 ‘먹방 영화’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내게는 ‘죽음과 죽음 사이에 밥이 있다’는 것을 환기하는 가족 영화로 다가왔다. 

이 영화는 없음으로 채워진다. 다른 가족에겐 있는 것이 이들에겐 없다. 우선 완전한 악인이 없다. 아빠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중심의 이성애 가족의 기본 프레임을 따르나, 부양의무를 진 아빠와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 양육에 헌신하는 엄마라는 틀을 깬다. 아빠는 딴 여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하고 전처 자식인 딸들과 왕래가 없다. 무려 15년. 엄마 역시 애들 두고 집을 나갔다. 나중에 외할머니 제사에서 오랜만에 집을 ‘방문한’ 엄마를 큰 딸이 원망하자 이렇게 말한다. “엄마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자기 욕망에 솔직한 부모. 아빠와 엄마는 부재하는 채로 존재한다. 

무임승차 하는 사람이 없다. 네 자매가 보살피고 배려하는 감정노동과 밥짓고 빨래하는 가사노동에 모두 참여한다. 각자 돈을 번다. 스스로 밥을 해먹고 매실주를 담그고 빨래를 개키고 일 하고 연애를 한다. 맏언니는 마더 테레사급 품성의 소유자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복 동생을, 가족 파탄의 원인 제공자인 딴 여자의 자식이 아닌 한 인격적 존재로 바라본다. 또래 답지 않게 의젓한 모습에서 일찍이 삶의 무게를 떠안은 자기 자신을 보고 “함께 살자” 손내민다. 

마지막으로 원망이 없다. 아버지의 외도, 죽음, 엄마의 가출, 이복동생의 출현이라는 막장 드라마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딸들이 의연하다. 부모에 대한 미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망하느라 일상을 중지시키는 게 아니라 묵묵히 살아가면서 원망한다. 그러는 사이 삶의 다른 경험이 쌓이고 그것으로 부모를 이해하는 다른 계기를 얻는다. 부모의 빈 자리가 타인의 이해라는 인간적 성숙함으로 채워진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부모 없어도 잘 크는 아이들에 관한 가족 판타지가 아니다. ‘정상 가족’이 아니라 ‘일상 가족’을 꾸리는 힘은 상실의 대처, 살림의 기술, 타인의 이해 같은 구성원들 삶의 태도와 역량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강력한 가족주의가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선 낯선 풍경이다. 우리는 가족의 가치만 신화화할 뿐 일상의 기술은 소홀히 여긴다. 그래서 소위 정상 가족은 구성원의 독점적 희생과 착취, 무임승차, 원망과 배제의 구조로 돌아간다. 배신과 죽음 등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상실의 사건에 무능하다. 불에 대인 것처럼 반응하고 고통을 전가한다. 

영화의 네 자매는 상실에 단련된 신체들로 등장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낸 상실 공동체이고, 그로 인한 원망과 투정을 들어주는 대화 공동체이며, 날마다 같이 밥을 먹는 밥상 공동체다. 그들이 영위하는 삶은 더없이 조화롭고 평화롭다. 혈연이 아닌 밥심으로 맺은 관계, 성취가 아닌 상실을 나눈 사이는 이렇게 힘이 세다. 

나는 영화에서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몇몇 이들을 떠올렸다. ‘엄마 아빠가 이혼했다’는 고백은 나를 놀래켰고 글에 담긴 삶에 대한 통찰은 나를 헷갈리게 했다. 그들은 결핍된 존재다. 그러나 그들은 넘치는 존재다. 그때마다 나는 질문했다. 결핍은 왜 결핍인가. 결핍의 기준은 무엇인가.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나의 오랜 물음을 영화로 근사하게 증명한 영화다. 글 버전도 있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에서 이렇게 썼다.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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