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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말라르메 "언어의 고행은 실존의 고행이다"

[비포선셋책방]

나는 의미란 게 정말로 시에 덧붙여진 어떤 것일까 여러 번 의심했다. 나는 우리가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시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점을 사실로 알고 있다."

 

어느 책에선가 보고 베껴놓은 문장이다. 어떤 글을 읽고 뜻도 모른 채 압도당할 때 가장 행복하다. 사고하지 않는 그 바보같은 상태에 빠지는 게 좋다.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턱 막히는 순간. 그것은 절정 체험이랄까 -.-; 머리가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가슴이 반응하는 거다. 황현산의 문장들은, 나를 종종 찰나에서 심연으로 이끈다. 말라르메 <시집>을 읽는데 황현산이 5년간 고심했다는 번역과 해설이, 말라르메의 시보다 더 감동적이다. (말라르메 시도 물론 정이 들려는 중이다. 더 여러번 읽어봐야할 것 같다. 처음엔 공부하듯이 무슨 시를 읽는가 싶기도 하지만, 잡지 보듯이 한 번에 쓱쓱 이해하면서 시를 읽는 것이 이젠 더 이상할 지경이다.)

 

좋은 책은 반드시 서문이 훌륭하다. <시집> 역시 시적이다. 책에 대한 안내, 말라르메에 대한 이해에 도움 받았다. 아주 어렴풋이. 필사하고 싶은 문장들 정리해보았다. 발췌 요약은 예전에 자주하던 짓인데 올만에 해봤다. 쓰는 순간 휘발될 것이 분명하지만 쓰는 동안이라도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 같아 좋다. 내가 쓸 수 없는 문장, 쓰다듬고 만질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말라르메의 시 쓰기는 실존의 고행이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다음은 황현산의 글을 정리한 것.

 

 

* 말라르메의 자리

말라르메는 프랑스 시 역사에서 가장 난해하고 형식적으로 가장 완벽한 시를 쓴 것으로 평가되는 시인. 시는 말라르메의 절대적인 목표였고 생애의 사건 전체이기도 했다. “그는 시간 밖에서 시를 썼다.”(시트롱) 현재의 인간이건 미래의 인간이건 인간의 이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작품 그 자체의 논리에만 의지하여 그것을 완결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편집적으로 몰두했다. 36년 동안 완성한 시 작품이 70편을 넘지 못했다.

 

문학사에서 볼 때 말라르메는 보통 환멸의 낭만주의라고 불리는 후기 낭만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시인이다. 낭만파 문인들은 신과 우주의 섭리에 역사적 진보의 원리를 대입하여, 인류 해방의 이상을 전파하는 일이 시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고결한 이상을 품고 비천한 사회에 등을 돌리도록 저주받은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말하지 않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시는 현실을 부정하는 독백이 되었다. 말라르메는 이 환멸의 부정적 효과에서 언어 소통의 새로운 힘을 발견해내고, 독백과 그 표현법인 은유를 시의 운명이자 사명으로 여기는 가운데 새로운 시어를 창출했다고 흔히 평가된다.

 

* 무의 발견과 말의 소멸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자로서의 초월적 존재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근대 사회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역시 문제된다.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의 실상이 우연한 현상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한 그 우연은 섭리의 한 과정이고 부분이라고 여길 수 있다. 건강한 나무와 마찬가지로 병든 나무도 어떤 높은 의지의 표현이며, 활기찬 짐승과 죽어가는 짐승이 모두 제가 있을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 초월적 의지라는 것이 애초에 부재하는 것이라면 저 벌레 먹은 꽃이나 피부병을 앓고 있는 짐승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서구의 문화 전통에서, 시는 초월적 존재자로부터 그 영감을 얻고 그 의지와 섭리를 옮겨 적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거기서 시인의 직업적 자부심이 비롯됐다. 신이 추방된 자리에 일반 물리학과 방불한 이성적 원리를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게다가 그 원리가 아무리 방대하고 섬세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인격신이 보장해주던 서정의 영감을 거기서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특권적 물질이지만, 그러나 그 생각이 진정한 것이라는 보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말라르메가 허무라고 일컫는 것은 신의 결여, 곧 말의 진정성을 보증해줄 장치의 결여라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니리라. 결여는 진리와 미에 대한 확신 아래서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의 결여다.

 

그는 비천한 물질의 상태를 벗어나고 우연의 중첩일 뿐인 거친 현실에 도전하기 위해 시를 쓰려 하지만, 시의 언어는 존재의 필연적이고 고결한 양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보다 우발적인 사건들과 잡다한 감정의 결합에서 울려나오는 빈말이 되어버릴 위험에 더 많이 직면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말라르메는 지금 모든 낱말에서 그 경험의 침전물을 제거하고, 그 여유 공간을 삭제하여, 말이 그 지시체와 충만하고 순결한 관계를 맺게 될 어떤 지점까지 시구를 파들어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실망스럽고 비루한 기억으로부터 그 사물을 최초의 순결한 모습으로 구출한다는 뜻이다.

 

이라는 말이 한 번 발음되고 소멸할 때, 우연하게 꽃의 모습을 둘러쓴 모든 물질의 꽃, 다시 말해서 현실의 꽃에 대한 모든 실망스런 기억이 함께 소멸하고 꽃이라는 생각만이 솟아올라야 한다. 꽃이면서 동시에 꽃의 부재인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데아는 순수 지성의 산물이지만 말라르메의 관념 그 자체는 우리의 물질 감각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순수관념은 끝없이 지성화 하려는 감성과 매 순간마다 감성화하려는 지성을 투명하게 결합하려는 열망이 있다. 말라르메의 시어가 노리는 순수 관념은 최소한의 육체적 계기,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을 유지한다.

 

* 순수 지성과 시인의 소멸

난해어법은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어법, 다시 말해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다르게 말하더라도 그 역시 아니다라고 말하는 어법이다. 말라르메가 불교를 알지 못하면서 불교적 에 도달했다는 말은 필경 반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승들의 문답법이야말로 지칭할 수 없는 어떤 깨달음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 언어의 논리를 무참하게 잘라내는 어법이 아닐까. 말라르메에게 중요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그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스스로 부정되는 그 말들의 효과에 있다.

 

네가 꽃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꽃을 보았다면 너는 그저 그런 꽃 한 송이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네가 정말로 무심한 상태에서 그 꽃을 보았다면 너는 우주의 한 얼굴을, 지극히 작은 얼굴이지만, 본 것이다. 말라르메에게서 낡고 우연한 관념들을 차례로 부정하고 색조와 선율로 하나의 인상이 되려는 이 시어의 지평선에서 순수 관념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언어의 고행은 실존의 고행이다. “순수한 작품이란 필연적으로 화자로서의 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시인은 낱말들에 주도권을 양도한다.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함으로써 동원상태에 놓인다. 낱말들은 마치 보석들 위에 길게 뻗어 있는 허상의 불빛처럼 그 상호간의 반영으로 점화된다.”(운문의 위기)

 

*대문자의 책과 시집

세계는 하나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주의 모든 것을 종합하는 책. 오직 내부의 질서가 존재할 뿐 바깥이 없는 책이다. 말라르메만큼 자신이 쓴 책으로보다 쓰지 않은 책으로 더 유명해진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책에 신념을 걸고 백지에 앉아 있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 발견된다. 불가능한 기획이 마침내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신념이 아니라, 적어도 그 기획에의 천착이 자신의 시 쓰기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 깊이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신념이다.

 

실현이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책의 개념은 그의 시 쓰기 속으로 들어와 내적 비평의 기능을 했으며, 사물과 생각과 말의 관계에 대한 성찰의 틀을 마련했다. 그는 자신의 열망을 실현된 작품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이기 이전에 포기될 수 없는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리라. 생각하는 것의 끝까지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없다. 시는, 패배를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

들뢰즈가 쓴 <니체와 철학>에도 말라르메와 주사위가 나와 찾아보았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말라르메의 이런 형이상학적인 현실부정적인 태도가 니체랑 반대되는 것은 알겠다. 말라르메는 부정의 권력의지가 충만한 시인. 니체는 즐거운 학문을 하는 긍정과 생성의 철학자니까. 다음은 알듯말듯 심오한 들뢰즈의 말.

 

말라르메는 항상 필연을 우연의 소멸로 간주했다. 말라르메는 주사위 던지기를 우연과 필연이 두 항으로서 서로 대립하는 식으로, 후자가 전자를 부인해야만 하는 식으로, 전자가 후자를 실패하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라르메의 시가 세계의 이원성이라는 낡은 형이상학적 사유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우연은 부인되어야만 하는 현존과 같고, 필연은 순수 관념 혹은 영원한 본질의 특징과 같다.

 

그러므로, 주사위 던지기의 마지막 희망은 어떤 성좌가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 필연을 책임질 때, 그것이 어떤 다른 세계 속에서 그것의 이해 가능한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성좌는 주사위 던지기의 결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의 한계로의 이행, 혹은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다.

 

말라르메에게서 예술 작품은 <정의롭지만> 그의 정의는 현존의 그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을 부인하고 그것의 실패와 무능을 전제하는 비난하는 정의이다. 그와 반대로 니체가 현존의 미적 정의에 대해 말했을 때 삶의 자극제로서의 예술과 관련되었다. 즉 예술이 삶을 긍정하고, 삶이 예술 속에서 긍정된다.

 

말라르메는 주사위 던지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주의에 의해서 다시 파악되고, 가책과 원한의 관점들 속에서 해석된다. 그런데 긍정하고 찬양하는 맥락으로부터 분리되고, 결백과 우연의 긍정으로부터 분리된 주사위 던지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주사위 던지기는, 사람들이 거기서 우연과 필연을 대립시킬 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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