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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01] 파랑도 / 이희중 (18)
  2. [2010.10.31] 박정훈 사진전 - 시가 흐르는 얼굴들 (7)
  3. [2010.02.25]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11)

파랑도 / 이희중

[올드걸의시집]

파전을 익히며 술을 마시는 동안

더워서 벗어 둔

쇠걸상에 걸쳐 둔

저고리, 내 남루한 서른 살

황태처럼 담배잎처럼

주춤 매달려 섭씨 36.5도의 체온을

설은살 설운살 서른살을 말리고 있다

소란한 일 없는 산 속의 청주(淸州)

한가운데 섬이 있다

소주집 파랑도(波浪島)

바람 불어 물결 치고 비 오는 날은

사람마다 섬이며, 술잔마다 밀물인데

유배지 파랑도에서

저고리는 매달린 채 마르기를 기다린다

술병이 마르기를 풍랑이 멎기를

 

- 이희중 시집 <푸른비상구>, 민음사


사진을 시작할 때부터 알던 후배가 있는데 어제 첫 전시를 했다.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 친한 선배부부가 하는 곳이다. 보도자료 써 달라, 일손 부족하다며 몇 번을 도와달라던 언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축하와 자봉을 동시에 해결하러 겸사겸사 갔다. 마당이 꽉 찼다. 엉거주춤 서 있다가 떠밀려간 곳은 싱크대 앞. 운명이다. 조용히 설거지를 했다. 전시오픈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뒷풀이를 가고 나는 스태프와 남아서 정리했다. 생맥주 기계에 술이 찰랑이고 항아리 뚜껑 접시에 골뱅이무침이 뷔페 상차림처럼 수북하다. “맥주가 마르지 않는 샘물이네" 너나없이 콧노래를 부른다. 알 굵은 골뱅이 반, 오이 반의 비율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돈 걱정 없이 맥주와 골뱅이를 포식할 수 있다는 기쁨에 먼저 취했다. 한옥 처마 끝 사이로 드러난 밤하늘을 힐끔거리며 모기를 잡아가며, 하얀 거품 1.2센티미터 짜리 맥주를 마셨다.

형부가 사진가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전문가로, 동료를 산에 묻고 온 적도 있는 험한 산을 탄다. 9월에 또 안나푸르나를 간다네. 죽을 줄도 모르는데 왜 자꾸 가세요? 물어보려다가 위험한데 왜 가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길은 항상 없어. 지나온 길 뒤를 돌아봐도 길이 없어. 어떻게 여길 왔나. 길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내 몸에 길이 있는 거야.” 루쉰의 길타령의 후속버전 같다. 형부가 작업실로 데려간다. 사진과 학생 때 군대에서 찍은 사진, 새벽마다 출사를 나갔던 90년대 청계천 사진, 에베레스트산 등반 사진. 영상으로 만들어놓은 파일을 봤다. 음악과 함께 흘러가는 시절. 파랗게 설운 스무살, 찡하게 설운 서른살, 점잖게 설운 마흔살. 희미해져가는 설움. 다시 맥주를 앞에 두고 형부가 말한다. 지영 씨 생각하면 애처로워. 자기 글을 쓰면 좋겠어. 더 능동적으로 기획을 해서 글을 써봐. 네. 착하게 대답하고. 형부는 마당에 담배 피러 나가고 여자 넷이 샘물을 마셨다. 언니가 주섬주섬 리본을 묶어서 나에게 건넨다. “난 술이 취하면 뭘 주고 싶어.” 주황색 양장본 노트. 비봉출판사 자본론 표지색깔. 폭풍 감동한 나는 어쩔 줄 모르다가 시 한편 읽어드릴게요.” 가방에서 김수영 전집1을 꺼내서 달나라의 장난을 읊었다. 언니가 나도하더니 가방에서 심보선 시집을 꺼낸다. ‘인중을 긁적거리며"라는 시다. 길고 긴 시 낭송. 소란할 일 없는 서촌의 한 가운데 섬이 있다. 유배지 류가헌에서 기다린다. 샘물이 마르기를, 설움이 멎기를.

후배 뒷풀이 자리에 들렀다가 축하의 술잔을 기울이고 귀가했다. 다음 날 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술을 먹나 봐라. 첫 애를 출산하고도 다짐했다. 다시는 애를 낳나 봐라. 총량은 과음규정을 크게 넘지 않았지만, 빈속에 설움과 시를 섞어 마셔서 그런가 보다. 자다가 먹다가 토하고 대오각성하며 누워있는데 전화가 왔다. N에서 공부하는 연구실 친구다. “어제 토론회 잘 했어? 서점에 갔다가 심보선 시집 새로 나왔길래 주려고 샀는데 못 전해줬네.” 맹렬히 돌던 팽이가 멈춘다. 구토와 설사와 눈물로 얼룩진 남루한 생의 시계가 멈춘다. 생의 어느 시점에 한 사람이 시를 낳고 그것을 누군가가 보고 또 한 사람을 떠올렸다는 사실이 왜 이리도 벅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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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사진전 - 시가 흐르는 얼굴들

[극장옆소극장]

간밤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사진전을 아직도 안 간 것은 의리없는 행동이다. 아무리 입이 헐고 피곤에 쩔어도 이럴 순 없다. 다음주 평일에 갈 예정이었는데 일정을 당기기로 맘먹었다. 아침에 눈 떠 친구한테 전화했다. "박작가오빠께서 첫 개인전을 하는데 같이 가자." "그래? 니가 좋아하는 그 박작가 오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지금까지 수십명이 넘는 사진가들과 취재를 다녔는데 친한 동료는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그 중에 사진가로서 존경을 보내는 이들은 둘 정도다. 그중 일인. 내가 장난삼아 박작가오빠라고 부르는 박정훈 선배다. 인물사진이 탁월하다. 미학적으로 감성적으로 둘다. 형식과 내용이 서로 맞물려 사진이 깊고 아름답다.


김기택 시인이 '삶의 진액'이라고 표현해서 끄덕끄덕 공감했다. 그 사람의 정수를 잘 담아낸다. 심연을 파고드는 매의 눈을 가졌다. 유난스럽지 않게. 덤덤하게. 같이 일해보면 선수와 선수 아님의 차이는 요란함 같다. 과함과 깊음이 동시에 추구하긴 어렵다. 그래서 내가 민중자서전을 하면 꼭 같이하고 싶었고 이미 삼년 전에 합의도 이뤄진 상태다. 둘다 생계형 일로 바빠서 마음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차분히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겠지. 같이 일하는 동료가 친분과 감동을 넘어 영감을 줄 수 있어야 좋은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암튼 일반인들에게 이름은 알려져있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사진 좋은 사진가'로 통한다. 첫번째 개인전이 늦은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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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차오르는말들]

고작 열흘 만이건만 그새 거리에는 봄기운이 파다했다. 햇살이 눈부시고 바람이 간지럽고 피로에 눌린 탓에 원래 크지도 않은 눈이, 마치 열리다 만 셔터처럼 반쯤밖에 안 떠졌다. 그 작은 눈으로 노선 번호를 잘 알아보고 버스를 탔는데 그만 내리는 곳을 두 정거장이나 놓치고 말았다. 허둥지둥 내려 건너편에서 다시 버스를 집어타고 거슬러 올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좁혀오는 버스 문틈사이로 겨우 발을 빼냈다. 내 손바닥 같은 활동구역에서 이렇게 해맬 줄이야. 아마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전지훈련 같았던 스위스여행에 익숙해진 몸의 소행이리라.  

길을 취재하러 가는 길. 이번 테마는 경복궁 3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직진하면 나오는 통인시장 부근 한옥길이었다. 시내에서 약속을 잡을 때 종종 들러 장을 보거나 근처에서 차를 마시던 동네이며, 서울을 여행하는 친구가 있다면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 냄새 나는 길이다. 조금 서둘러 출발해 길담서원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신간을 둘러봤다. 막간을 이용해 정아언니와 접선을 하고 수녀님을 만나 시장으로 향했다. 골목만 돌아서면 동네 이름이 바뀌는 효자동, 누하동, 누상동, 통인동, 옥인동 등 경복궁 서쪽에 있다하여 지어진 ‘서촌’ 일대를 두세 시간 발로 누볐다. (사진:한겨레) 

취재를 마치고 수녀님이 아는 예쁜 카페가 있다하여 경복궁 방향으로 길을 건넜다. 여기는 아니지만 돌아가면 거기가 나올 것 같다며 들어선 골목길. 안으로 깊숙이 굽이쳐 들어가자 떡하니 남의 집 대문이 나온다. 막다른 길이다. 다시 돌아 나오는데 골목길이 또 다른 샛길로 안내한다. 외관만으로도 메인쉐프에게 신뢰가 가는 근사한 파스타 집, 벽면을 유리로 내서 멋진 작품을 걸어놓은 갤러리 등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개성 넘치는 감각적인 한옥들이 듬성듬성 있으니 한 블록 지나가기가 하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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