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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라 버마행동 대표 - “정부 비판한다고 난민 불허”

[행복한인터뷰]

가난한 불빛 번지는 거리를 지나간다. 저만치서 불쑥 나타난 경찰이 불러 세운다. 신분증을 요구한다. 난민을 신청한 상태라고 말한다. 일단 차에 태운다. 전화로 확인이 끝나면 그제야 풀려난다. 무시로 겪는 일이다. 이 번거로움을 피하려면 이걸 들고 다녀야 한다. 인도적 체류를 허가한다는 법원 판결문. A4크기 한 장이다. 가방 없이 가볍게 외출할 때가 문제다. 맨 손에 문서만 팔랑팔랑 들고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검문을 피해갈 재간도 없다. 운수 사나우면, 또 경찰차 신세다.  

시도 때도 없이 존재증명-노동에 시달리는 뚜라 씨. 여러모로 고달프고 씁쓸하다. 지난 10월 버마행동 회원 8명을 난민으로 인정해야한다는 서울고법의 판결이 나왔다. 그런데 정작 버마행동 대표인 뚜라 씨만 난민인정 대상에서 쏙 빠져버렸다. ‘버마행동’은 산업연수생 등으로 한국에 들어온 버마인들이 자국의 민주화를 위해 결성한 정치단체다. 그간 이주노동자 인권 운동과 버마 민주화 운동 등 적극적 활동을 펼쳤고 그 시작과 선두에는 뚜라 씨가 있었다. 그들은 왜 난민을 원했고 그는 왜 배제되었나. 12월 5일 부천시 심곡본동 버마행동 사무실에서 뚜라 씨를 만났다.  

버마행동 대표로서 난민신청

“처음에는 난민을 신청할 생각이 없었어요. 2003년 한국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어요. 버마 친구들과 농성에 참여했죠. 친구들 몇 명이 모여서 우리가 왜 이렇게 한국 땅에서 쫓겨난 모습인가, 버마문제 때문이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 자리에서 제안하고 동의해서 바로 ‘버마행동’을 만들었죠. 항의 농성하고 기자회견 하고. 전부 얼굴을 노출하고 활동했어요. 이대로 가다가 활동가들이 쫓겨나겠더라고요. 안정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 2004년 5월 난민을 신청하게 됐습니다.”  

6년 전, 버마행동 대표 뚜라 씨는 인천출입국사무소로 찾아갔다. 그런데 난민신청서를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담당자가 밖에서 단속하고 있다고 했다. 기다렸다. 돌아온 담당자는 조롱하듯 말했다. ‘뻔히 안다. 한국에서 돈 벌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다. 버미인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말씨름이 벌어졌다. ‘개인적인 이유라면 난민인정 만이 아니라 집이나 차를 줘도 한국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필요로 한국에 머물기 위해 난민 신청하는 것뿐이다’ 강하게 항변했다.  

“그 마음 아직도 변치 않았어요. 내 역할이 버마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커요. 지금 버마 젊은이들 의식화 사업이 아주 중요하거든요. 여기서 활동가를 교육시켜 버마로 보내고 버마 내 도서관 만들기 등 각종 민주화 투쟁을 지원해요. 한국과 국제사회에 버마의 상황을 알리는 일도 하고요. 그런데 내가 지금 버마에 가봤자 할 수 있는 역할이 작아요. 그게 아니면 여기에 왜 있겠어요.”  


“한국 반정부 활동가로 찍혔다”

뚜라 씨는 1994년 한국에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입국해서 경기도 일대 제조업체에서 프레스 기계가공분야에서 일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 한 달에 18만원 받았고 야간수당은 한 100시간 넘게 해야 5만원 받았다. 산업연수생 처지를 악용해 업주가 노골적 착취를 일삼았다. 노예에 가까운 생활을 강요당한 뚜라 씨는 서서히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비인간적 횡포에 눈떴고 저항했다. 2003년 버마행동을 발족시키고 2004년부터 이주노동자방송 공동대표로 나섰다. 어느 날 ‘이주노동자 활동가’된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 활동가들 중에 민주화운동 하려고 한국에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에요. 저 역시 처음에는 버마인 인권탄압에 문제를 느끼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산업연수생 제도 철폐 시위, 여수 참사 집회, 단속 사망 사건 항의 등에 다 참여했죠. 이런 활동을 법무부 쪽에서는 한국에 대한 반정부 활동으로 판단해요. 싫어하죠. 버마민주화를 위한 활동이랑 상관이 없다는 거죠.  

그런데 아니에요. 한국에 버마인이 3~4천 명입니다. 더 많이 버마 민주화 운동에 관심 갖고 참여하면 좋잖아요. 그래서 노동 상담이나 인권 문제로 다가가서 돕고 관계 맺고 버마의 현실을 알리는 거예요. 한국 반정부 활동이 아니고 버마인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얘기하는 건데 정부에서 들어주지 않으니까 길거리로 나와서 전달하는 거죠. 그런데도 아직까지 저를 미워하고 있어요.” 

버마 난민 100 명, 기준은 글쎄

갑갑한 현실에 허탈한 웃음을 짓는 뚜라 씨.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버마인이 모두 100여 명이다. 소수민족 인종차별, 종교, 민족, 정치적 탄압 등을 이유로 신청한 경우 거의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버마에서 소수민족이라고 무조건 탄압 받는 것은 아니다. 버마민족인데도 마을전체가 포탄을 맞는 등 대학살이 이뤄진다. 하지만 심사 과정에서 그러한 현지상황을 세세히 알아보지 않는다.  

또한 한국에는 버마 민주화단체가 2곳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한국지부와 버마행동. NLD활동가 30여 명은 거의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들은 버마 민주화에만 집중하고 한국에서 일하는 버마인 인권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버마행동은 “순수(!) 정치조직이 아닌 민중운동조직으로 한국정부에 찍혔다.” NLD한국지부 활동가와는 대조적으로 버마행동 활동가는 이제껏 난민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것.

“감정가는 대로에요. 한국에 있어도 문제없을 거 같으면 쉽게 넘어가는데 한국 사회를 잘 알면 문제 삼아요. 저한테도 경제적 목적으로 난민지위를 신청한다고 주장하면서 버마민주화 활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그런데 (버마행동을 위해) 10년 가까이 매월 회비 십만 원 씩 내면서 평일 밤과 토요일 일요일을 일했어요. 난민 신청 받으려고 10년 가까이 그런 고생을 누가 하겠어요.”  

앞서 말한 대로, 뚜라 씨는 버마로 돌아갔을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며 정치적 난민을 신청했으나 허가는 나지 않고,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된다며 인도적 체류 증서만 나온 상태다. 귀퉁이가 닳아 너덜너덜해진 증서를 투명 파일에 고이 끼워 보관해두었다. 간편하게 허가‘증’ 형태로 발급 받으려고 했으나 출입국사무소 담당자가 그동안 불법체류 기간을 계산해서 벌금 2000만원을 먼저 내라고 엄포를 놓았다. 설상가상이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저 낡은 서류 한 장에 한국에서 살 권리를 의탁해야 하는 처지다.

박해와 죽음 각오됐다

뚜라 씨는 요즘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전기 컨트롤 박스 만드는 업체에 주2-3회 출근한다. 버마행동 자금마련 등 돈이 필요해서다. 고된 노동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좋아졌다.” 낮에는 생각의 전원을 내리고 전화기도 꺼놓고 오로지 몸만 쓰고 일만 한다. ‘의식의 백지상태’를 유지하다가 밤에 귀가해서야 활동가 모드로 변신한다.  

“활동가 일이 훨씬 힘들어요. 회사에서는 맡은 일만 하면 끝나고 몸 힘든 건 잠깐 쉬면 낫잖아요. 근데 활동가 일은 눈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심지어 꿈속까지 일이 끝이 없어요. 많이 지쳤고 계속 밝은 모습으로 지낼 수가 없었어요. 일 년 사이 일을 많이 줄였어요. 그랬더니 지금은 밝은 모습으로 지내요.”  

한국체류 17년.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숨을 고르는 중이다. 그 뿐 아니다. 헬스클럽에서 운동도 열심히 한다. 남들은 근육몸매 만들려고 운동하는 줄 아는데 투쟁의 일환이다.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감옥에 갔을 때 한번만 맞아도 죽을 수도 있으므로 오래 살고 견디기 위한 노력이다. 만일의 사태, 즉 투옥에 대비하고 “박해와 죽음까지도 각오한다”

가슴 아픈 버마현실 선전투쟁

그럴 만큼 버마의 상태는 악화일로다. 88년 민주화 대투쟁 이후 아웅산 수치 여사의 NLD가 19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미얀마 군정은 정권 이양을 거부했었다. (민주화 운동가들은 군부가 바꾼 국호 ‘미얀마’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외침을 군홧발로 짓밟은 군부는 2007년에는 거리에 나선 승려들과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버마 민주화의 상징 수치 여사는 20년 중 14년을 가택연금 당했다가 최근 석방됐다. 미얀마 군부가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또 국가통합이란 이름으로 엄청난 폭정을 휘두르고 있다. (2011. 12. 11. 한겨레 참조)  

이러한 참담한 버마의 실상을 한국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버마행동이 존재한다. 그런데 아시아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와 연대가 전무한 상태다. 버마를 불교국가이거나 혹은 투자하기 유망한 나라로만 인식할 뿐이니 활동가들은 애가 탄다. 야속하다. 그럴수록 더 치열하게 활동할 밖에. 안으로는 버마 알리기에 주력하고 밖으로는 버마 민주화에 헌신한다. 활동가를 교육시켜 보내고 버마 마을에 도서관, 세미나, 주민 센터, 야학을 만드는 등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버마는 지식이나 정보가 차단돼 있어 저런 모임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버마 젊은 친구들 봤을 때는 가슴이 너무 아파요. 버마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다 가슴 아프죠. 왜 이런 지경일까. 정치만 잘 풀리면 되는데, 사람들 인격도 좋고 자원도 풍부하고 잘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하다보면 가끔 눈물 많이 흘려요. 버마행동 회원들도 젊은 나이에 한국 와서 고생하고, 시간 흘러가는 거 보고......” 


회한에 젖어든 뚜라 씨.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이 국민이 아니라 국민인 한에서 인권이 부여되는 국민국가에서 그는, 그리고 그의 친구들은 철저히 비인간으로 존재했다. 대한민국의 과부족 노동력을 제공하면서도 맘 편히 잠들고 보행할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다. 국적과 인권의 두 다리를 잘린 채 살아갔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말대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당할 때 사람은 올바로 사고 할 수 있는 법.  

뚜라 씨는 위험을 알면서도 거리로 뛰쳐나가는 모험을 단행했고, 노예적 억압과 인간적 존엄 사이에서 부드러운 결단을 내렸으며, 어려운 시절 동료들과 머리 맞대고 수저질하던 배고픈 기억을 아름답게 간직했다. 17년 험한 세월 모진 고통이 그를 평범한 노동자에서 당당한 자유인으로 길러냈다. 이제는 어디에서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가를 가늠해 삶의 근거지를 정하고 ‘제 갈 길을 가려한다. 남이야 뭐라던!.’ (맑스)  

난민 상관없이 내 길 간다

“난민은 신청을 해놓았지만 한동안 잊고 살았어요. 진짜 인정받고 싶었다면 여러 가지 준비하고 자꾸 물어보고 그랬을 텐데 다른 일이 많아서 신경 쓸 틈이 없었죠. 음. 난민이 된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요. 한국 정부가 뭐라던 제 신념과 제 일을 해나갈 거예요. 저는 한국 사회에 해 끼친 것 없어요. 버마에 돌아갈 때도 좋은 모습으로 돌아갈 거예요. 울고불고 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정의, 정당한 결정과 평등한 이유로 쫓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결정을 내리면 버마 민주 활동을 위한 제 역사를 보여줄 거예요. 저의 버마민주화 운동이 난민인정 받기 위해서라는 건 모욕하는 말입니다. 이주노동자 인권활동 때문에 난민을 받아줄 수 없다면 수용하겠지만 버마 민주화 활동을 모욕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토요일 밤이 깊어갔다. 버마행동 사무실로 퇴근한 뚜라 씨는 인터뷰를 마치자 좁은 부엌에서 친구들과 늦은 저녁을 해 먹는다. 곧 개미가 기어 다니는 누런 장판에 둘러 앉아 회의와 토론으로 밤을 보낼 것이다. 십여 년 째 반복되는 주말 풍경이다. 이 단내 나는 세월을 오로지 난민인정용 ‘연극’으로 해석하는 부당한 판결이 내려진다면 어찌 온 생애를 걸고 저항하지 않겠는가. 유순한 난민이 되느니 견결한 투사로 살리라. 그의 삶은 명령한다. 


* 위클리수유너머 45호 전선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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