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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08] 김언, 미확인물체 (2)

김언, 미확인물체

[올드걸의시집]

비가 왔다. 확인되지 않은 미아삼거리에서 칼국수를 먹

었다. 어제는 확인되지 않은 중국요리를 먹었다. 확인되지

않은 중국집 이름은 진짜루. 확인되지 않은 단무지와 양파

와 서비스로 나온 군만두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확인되

지 않은 누군가와 확인되지 않은 수표를 내고 나왔다.

인되지 않은 경품이 걸린 쿠폰을 받고 버렸다. 부산에 사

는 내가 언제 다시 오겠냐. 확인되지 않은 정류소 쓰레기

통 앞에서 확인되지 않은 택시를 타고 그는 갔다. 확인되

지 않은 길을 걷다가 확인되지 않은 동네 이름을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확인되지 않은 버스 안에서 확인되지

않은 기차를 타고 가는 그를 상상했다. 그는 확인되지 않

은 곳을 지나고 있다. 천안 아니면 대전쯤? 진짜로 그가 하

고 싶은 말은 헤어질 때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어제도 그

제도 나는 확인되지 않은 논문을 읽고 확인되지 않은 보

고서를 작성하고 확인되지 않은 일기 예보를 믿고 나왔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비가 그친 것 같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와 나는 친구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사진에도 찍혀 있다.

그 빗방울이.

 

미확인 물체」 - 김언 <<소설을 쓰자>>, 민음사

 

 

 

신촌역 지하도로 내려가는 길에 할머니들이 새둥지처럼 좌판을 틀고 앉아계신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눈 마주칠 일은 없고 할머니의 나뭇등걸 같은 손이 보이는데 그 손이 발목을 잡으니, 냄새가 없고 부피가 크지 않은 품목으로 가끔 산다. 할머니 기장 얼마에요. 삼천 원. 나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싸다. 왜 이렇게 쌀까. 좌판이니까 그래도 오천 원쯤 할 줄 알았다. 유기농 매장에서는 저 정도면 8천 원 대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반투명 비닐봉지에 들어있는데도 색깔이 색소 입힌 것처럼 샛노랗고 알이 굵다. 중국산이 틀림없다. 기어코 묻고 만다. 할머니 이거 중국산인가 봐요? 아니야. 국산이야. 할머니는 짧게 쏘아붙이더니 고개도 들지 않고 완두콩을 계량하여 봉지에 담고 있었다. 나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멍하니 할머니의 완악한 손놀림을 좇았다. 식별불가능한 깨알 같은 글자의 품질표시에 비하면 할머니의 우격다짐은 당당하고 투명하다.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을 내고는 확인되지 않은 국산 기장을 가방에 넣었다.

 

하루는 슈퍼에 장보러 갔더니 풀무원에서 신제품이 나왔다고 시식하란다. 냉동식품 핫도그인데 제품명이 올바른 핫도그. 원산지, 첨가물 등 소비자의 불신이 커지니까 신뢰받는 제품이 되고자 지은 이름인가보다. 살색 핫도그 옷에 새겨진 올바른 핫도그라는 문구는 조폭 사무실 벽에 걸린 착하게 살자만큼 코믹했다. 시식하는 아주머니가 감탄하신다. 요즘은 제품 이름도 참 잘 지어요. 안 그래요? 호호호. 그러네요. 같이 웃었다. 아무려나, 어떤 올바름인지 누구를 위한 올바름인지 미처 확인되지 않았지만 올바른 핫도그는 올바른 소비자에 의해 날개 단 듯 팔려갔다. 나는 사지 않았다. 무슨 가훈도 아니고 집집마다 냉동실에 누워 올바름을 표방해야 하는 핫도그의 처지도 안쓰럽거니와, 간식을 먹을 때조차도 핫도그에게까지 올바름의 세뇌를 당할 아이들이 불쌍했다.

 

고등학교 교사 후배가 고3담임을 맡아 주름이 는다며 하소연 끝에 하는 말. 언니, 엄마들이 와서 하나같이 그런다. 우리 애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은 안 올라서요. 그 말 들으면 답답해. 공부해도 성적 안 오르는 건 없거든. 안 하니까 안 오르지. 엄마들은 애들이 공부하러 학원가면 공부하는 줄 알고, 공부한다고 방문 닫고 있으면 진짜 공부하는 줄 아나봐. 엄마가 자기 자식을 그렇게 모르나. 어디까지 말해주어야 할지 모르겠어. 하긴 말해도 안 믿는 눈치더라... 자식 키우는 일인으로서 뜨끔했다. 아침마다 현관문 열고 나가는 아들 등판에 대고 한마디씩 꼭 한다.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 찰떡같이 답한다. 학원에서 터덜터덜 돌아오는 아들과 눈을 맞추고 공부 잘 했냐고 물으면 네. 한다. 성적표를 보면 꼭 그렇게 열심히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지만, 학교장 도장이 찍힌 문서보다 확인되지 않은 대답에 더 도취된다.

 

그래야 굴러간다. 하루가. 인생이. 관계가. 이 세련된 무지가 삶을 이끈다.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속을 알 수 없는 만두와 알고도 속는 국산기장과 올바름을 표방하는 핫도그 같은 아들과 일기예보 같은 서툰 예언이 어우러진 삶. 이혼한 친구는 아이에게 아빠가 지방근무 한다고 둘러대고는 어쩌면 아이가 알지도 모른다는 확인되지 않은 불안을 견딘다. 부모님이 헤어진 사실을 10년 동안 모르고 살았다는 한 청년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부부라고 말했다. 학교와 언론에서는 딸들에게 밤길을 조심하라고 떠들지만 성폭행은 심야보다 백주대낮에, 바깥보다 집안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여성단체에 있는 친구는 말했다. 주변의 연애관계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보았다. 우체국에서 택배 오듯 이별을 통보받은 후 변심한 이유라도 알자며 매달려 봤자 진짜로 그가 하고 싶은 말은 헤어질 때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변심 안에 내심이 또 있는 게 아니니까.

 

계란 노른자처럼 또렷한 삶의 본질과 흰자처럼 투명한 관계의 진실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삶은 쉽게 부서지는 얇고 허약한 껍데기인지도 모른다. 가상, 허위, 오류로 거미줄처럼 정교한 삶의 그물을 짜고 거기에 몸을 기대어 거미처럼 살아간다. 여기에 어떤 체념이나 회한은 없다. 그냥 그게 삶이려니 생각한다. 적당량의 진실, 적당량의 기만. 살아있는 것들이 살아가기 위해 하는 짓을 두고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긍정하는 거짓의 능력이라고. 진리를 찾지 말고 삶을 이롭게 하는 더 아름다운 거짓을 창안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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