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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 - 사람, 걷기, 공부의 조합에 마음 설레다

[은유칼럼]

학교 운동장 수돗가 크기의 족탕에 두 발을 담그고 앉았다. 뜨끈한 김이 오르는 온천수 아래로 짚신처럼 쭈글쭈글하고 단풍처럼 붉어진 두 짝의 발이 나란하다. 총 길이 12㎞, 다섯 시간 코스 종착점에서 수고한 발을 달래주는 시간. 오늘 얼마나 걸었나 보자며 한 사람이 스마트폰을 열었다. 1만9000걸음이란다. 나도 열어보았다. 2만2000걸음이다. 아침부터 같은 동선으로 같이 다녔는데 왜 숫자에 차이가 나죠, 묻자 누군가 말했다. 다리 길이가 다르니까요. 맨발의 어른들은 ‘롱다리 숏다리’ 얘기에 깔깔깔 즐겁다. 

<시사IN> 창간 10주년 기념 규슈올레 걷기 행사에 3박4일간 동행했다. 독자 61명과 길을 걷고 강연을 듣고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나는 여행을 썩 즐기는 편은 아닌데 ‘사람, 걷기, 공부’의 조합에 마음 설레어 나섰다. 자연보다 사람에 자극받는 편이고 달리기보다 걷기, 놀기보다 공부가 적성에 맞는다. 이 세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삶도 걷기도 공부도 서두르지 않고 자기 속도대로 꾸준히 해나가는 일, 결과보다 과정이 소중한 행위라는 점이다. 

ⓒ시사IN 신선영

“보행은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20쪽).” 리베카 솔닛의 말에서 보행을 공부로 바꿔도 뜻이 통한다. 책 한 권을 읽거나 강연 한번 듣는 일은 산책 한번 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는 별다른 변화도 보상도 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거랑 당장에는 비슷하다. 그런데 그것들이 쌓여서 몸의 감각이 변하고 삶의 자리가 달라진다. 태생적으로 경쟁을 무서워하는 나는 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가까운 일”로 인생의 지면을 채우며 생산 지향적 사회에서 간신히 살아왔다. 

이번 걷기 여행에서도 하위 그룹에 섞였다. 내 뒤에 오던 이가 힘들어서 못 따라가겠다고 헉헉대자 가이드가 조언했다. “그냥 지금처럼 가셔도 돼요. 앞에 가는 사람은 신경 쓰지 말아요. 맨 앞에 가는 사람들은 빨리 못 가게 하면 병나는 사람들이에요. 나중엔 다 만나요.” 원래 60명 정도가 걸으면 선두에서 후미까지 한 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그 말이 꼭 세상의 운행 원리를 밝히는 스님의 법문처럼 가슴에 박혔다. 

속도 숭배의 사회에선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목소리가 어딜 가나 들린다. 글쓰기를 배우는 학인들은 잘 쓰는 동료 때문에 기죽는다고 호소한다. 난 수영 강습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초급반에서 가장 진도가 느려서 자주 창피한데, 수영대회 출전을 위한 게 아니고 건강을 위한 운동이므로 뻔뻔하게 다닐 것이며 2~3년 지나면 웬만한 영법은 하겠지 생각한다고, 글쓰기도 당장의 시간 투입 대비 산출을 셈하지 말고 묵언 정진하라고 말한다. 빨리 배우라고 하면 병나는 종족인 내가, 빨리 못 배우면 병나는 종족들에게 어쭙잖은 충고를 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남에게 하는 말은 곧 나에게 하는 말. 

전복적 우회를 택하는 용기 

리베카 솔닛 지음김정아 옮김반비 펴냄

규슈올레 마지막 날, 미야마 코스는 두 시간 소요 예정인데 30분 일찍 목적지에 전원이 도착했다. 진행 스태프가 왜 이리 빨리 걷느냐고 ‘천리마운동’ 하시느냐며 지청구를 주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걸었다. 일하던 컴퓨터를 켜놓고 빠져나온 직장인, 연기된 수능을 보는 동생과 엄마를 두고 혼자 온 대학생, 나 홀로 일하는 앱 개발자, 여고 동창들과 외유 나온 어르신 사총사 등, 하던 일도 보폭도 폐활량 나이도 제각각 다르지만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여가를 오그라뜨리고 존재를 짜부라뜨리는 지점(31쪽)”에서 전복적 우회를 택하는 용기를 냈다. 

“중류층의 육체를 집과 사무실에 갇혀 있는 시대착오적 물건으로 변형시키는 환경”, 돌아다니기에 알맞은 사람의 몸을 “공장의 기계 부품으로 변형시키는 환경(274쪽)”에 대한 거부로서 걷기가, 못생긴 발을 마주하는 가식 없는 만남이 여행이 아닌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시사인에 게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