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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3] 김우창 평론집 - 궁핍한 시대의 시인 (2)

김우창 평론집 - 궁핍한 시대의 시인

[올드걸의시집]

 

 

 

시세미나 시즌 4의 마지막 순서로 김우창 평론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읽었습니다. 양장본의 딱딱한 물질성만큼이나 내용도 묵직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역시나 시세미나의 마법으로 십시일반 경험과 이해를 나누며 우리는 희미하던 인식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신비로운 과정을 눈덩이가 달로 뜨는 그림으로 표현해준 진스님이, 김우창 전집이 머리말부터 좋았다며 감명 깊었던 문장을 읽어주었죠.

 

일의 시작은 결단을 요구한다. 이 결단은 시작의 의지를 하나로 굳히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역량의 부족함과 제약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망설이는 것은, 상황의 불균형과 예측불가능 속으로 자신을 던졌을 때 그에 따르는 책임이 두려워서라는 내용입니다. 그 부분에 모두 공감하여 밑줄 긋고 필사의 의지를 다졌지요. 김우창은 말합니다.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는 비장한 용기에서 행동의 엄청남과 영광이 오는 법이라고요. 새해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벗어나보자, 글을 읽는 동안은 잠시 나태한 정신을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죠. 저는 갸웃갸웃하던 마음 접고 상징주의 시세미나하기로 결단했습니다. ^^;

 

고은 : 한용운 - 궁핍한 시대의 시인

 

늘 시세미나에 나오는 시를 수능 출제경향으로 풀어주시는 고은샘이 한용운 평론의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었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그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활동 전체에 관류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존재 방식에 대한 반성이며 증언이다.

 

김우창은 한용운 시의 근본양식을 존재와 부재의 역설적 상호작용으로 봅니다. 님의 침묵에 있어서 진리()는 부재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님의 침묵의 고통은, 이 부정의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고통이 됩니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 나오는 여러 시편들에서 언어에 대한 불신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존재가 언어에 담아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죠. 한용운의 시는 모순적인 언술이 많죠. 이별은 미의 창조도 그렇고, 니믈 매려던 버들가지는 님을 위해서 달리는 말의 채찍이 되기도 하고요. 뭐가 이리 어렵고 복잡한가 싶은 한용운의 존재 방식을 김우창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님의 인식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님과 나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의 의의다. 님이 부재하는 세계에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님의 침묵은 이 괴로움에 대한 하소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사실 한용운은 죽음과 삶을 늘 저울질한다. 결국 그는 삶을 받아들이지만 그 삶은 복잡한 변증법을 통하여서만 정당화된다.

 

소영 : 윤동주 - 시대와 내면적 인간

 

착해서 그의 시가 좋다며 천생 모범생 기질을 숨기지 않는 소영이 윤동주의 발제를 맡았습니다. 시대와 내면적 인간. 제목이 윤동주를 표현하는 한줄 슬로건으로 딱 맞춤하다고 감탄했지요. 김우창은 윤동주를 보는 기본적인 틀은 이렇습니다. 시대의 어둠이 한 내면적 인간에게 억압의 무게를 더하며 내면화의 고독과 침묵을 깊게 하고 조여 오는데, 이 이중의 압박에서 풀려나오려는 충동은 비극적 대결일 수밖에 없고 윤동주를 양심의 수난자로 길러냈다는 거죠. 그러면서 윤동주의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자기 응시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그의 자아의식에는 골똘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사심 없는 초연함이 있다...삶의 밑바탕으로서의 자기를 확인하는 행위일 수도 있고 또는 보다 동적으로 삶의 가능성을 개체적인 생애 속에 구체화하고자 하는 자기완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일 수도 있다...윤동주의 근본적인 관심은 의식 작용을 통하여 드러나는 자신의 도덕적 형이상학적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며, 또 이것을 구체적인 삶으로 구현하는데 대한 관심이었다...그가 원했던 것은 자아의 미적, 실존적, 윤리적 완성이었다.

 

윤동주는 당대의 사회가 넓은 의미에서 자기 완성의 추구를 허용하지 아니한다는 점을 괴로워했습니다. 가혹한 시대는 자아의 탐구자에게 비장한 수난의 지위밖에 허용하지 않았으니까요. 이 어려움은 그의 시에 깃든 어떤 미완성감과 침묵으로 밖에 남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윤동주는 의식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였지만 짧은 생애로 인해 성공하지는 못했지요. 내면의 완성도 동적인 삶의 추구도 미완의 과제로 끝난 점을 아쉬워하면서 김우창은 괴테의 글을 인용합니다.

 

사람의 본질은 활동하는데 있고 쉬어야하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 그동안에 바깥 세상의 사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이 인식은 그 다음의 활동을 쉽게 해주어야 한다.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

 

연안 : 김수영 - 예술가의 양심과 자유

 

발제문에 예쁜 고양이 도장 찍어온 연안. 가장자리-경계를 삶의 자리로 채택한 연안은, 늘 생활인과 시인의 경계에서 흔들리며 불안과 대결하며 살다간 시인 김수영을 멋지게 압축해왔습니다. 김우창은 김수영의 생애와 저작을 통해서 예술가의 양심과 자유의 의미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김수영의 자유는 삶의 근본적인 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김수영의 예술가적 양심은 감정과 사실의 바른 일치에서 출발한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김수영에게는 불가능의 자유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의무 중 하나였다...등등 김우창과 김수영의 언어가 뒤섞여서 주옥같은 어록이 쏟아집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시적 정직이라는 말이 남아요. 김수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시적정직이 아닐까.

 

나는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극장에, 이 거리에, 저 자동차에, 저 텔레비전에, 이 내 아내에, 이 내 아들놈에, 이 안락에, 이 무사에, 이 타협에, 이 체념에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마비되어 있지 않다는 자신에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삼동유감) 이러한 과정을 거쳐 60년대 김수영의 후기시들은 너무나 명증하게 사실적이기 때문에 시를 난해하게 하는 냉철한 자기이해, 냉철한 사회이해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창작자유의 조건)

 

김수영은 가장 날카로운 정치적인 감각을 가졌던 시인이다. 참여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을 읽어내려면, 그의 예술로서의 전위의식과 정치의식이 마주치는 지점을 파악해야 한다. 김수영은 그 접합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해야 한다.”(시여 침을 뱉어라) 이 역설적인 문장은 궁극적으로 시나 정치는 다 같이 동일한 생명충동의 표현으로서..시적 행동과 정치적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바람도리 : 정현종 - 사물의 꿈

 

내용이 너무 어려운데 너무 좋아요, 하던 바람도리님 말에 우리는 수긍했습니다. 어려워도 이해 못해도 좋고 끌리고 떨리고 할 수 있지요. 논리적 이해가 아닌 직관적 이해가 가능한 것이 문학의 힘 아니겠습니까. 김우창이 분석한 정현종 시세계의 출발점은 죽음.

 

죽음의 한계는 우리 삶으로 하여금 죽음의 어둠 속에 명멸하는 찰나의 환몽처럼 허무한 것이 되게 하고, 또는 삶으로 하여금 죽음의 어둠에 대조되는 보다 뚜렷하고 아릿하게 날카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정현종의 시의 근본적인 활력을 공급하고 있는 것은 죽음과 삶의 양면적 긴장관계이다... 삶이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애처로울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요, 긍정이다.

 

앞의 평론들도 그랬지만, 사물의 꿈.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만나 지극한 울림을 만들어내죠. 평론 제목이 너무 단아하고 아름답다 했더니만 정현종 첫 시집 제목이었습니다. 김우창은 정현종이 인간의 情意와 사물이 하나라고 본다고 말합니다. , 사물로 하여금 사물이게 하고 또 동시에 인간의 의지와 감정으로 하여금 그것 스스로이게 한다는 것인데요. ‘소리의 심연이라는 시를 예로 들며, 시인이 듣는 소리는 곧 사물 자신이 필요로 하는 소리와 등가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소리의 껍질을 벗긴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랑이 깊은 귀를 아는 소리는

도둑처럼 그 귀를 떼어가서

소리 자신의 귀를 급히 만든다

소리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붙인다

내 떨리는 전신을 그의 귀로 삼는 소리들

모든 소리에 핵 속에 들어 있는 죽음

모든 소리는 소리 자신의 귀를 그리워한다.

 

정현종이 지금까지 시적 탐구에서 도달한 점은 꿈과 사물이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매우 중요한, 중요하면서도 오늘날의 현실에서 상실되어버린 인식이다. 상실되었다는 것은 꿈이 개인의 내면으로, 사물이 사회와 과학의 관료조직 속으로 도망해 들어갔다는 말(이다)...

 

평론의 힘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 다행히 시즌5 ‘소영의 시집은 정현종의 시집이 제 1권으로 짜여 졌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평론에 언급된 시만으로도 시인에 대해서 호기심이 일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죽음, 심연, 허무, 춤 등 니체적인 언어가 가득하니 김우창이 철학적이라고 언명한 정현종의 시세계에 하루 빨리 초대받고 싶어졌답니다.

 

진스 : 김종길 - 감성과 비평, 엄결성의 시학

 

국어 교과서와 시험에 자주 나와서 친숙한 시 성탄제를 쓴 김종길의 시론에 대한 비평을 진스님이 친절히 풀어주셨죠.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한다.” 가슴 덜컹하게 하는 머클리쉬의 시구 하나 건진 것만으로도 충만한 느낌. 그러나 내용은 전반적으로 김종길에게 호의적인 것 같지는 않다는 진스님의 소감. 이런 구절이 있어서죠.

 

김종길의 감식력은 대개 정확하게 움직이지만 거기에 불가피하게 따르게 마련인 비평의 어휘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적 넓은 폭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경우 불철저하게 사고된 것으로서 주어진 콘텍스트 안에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김종길 디스로 사료되는 두 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단어의 용례를 배웠습니다. 스노비즘과 염결성.

 

스노비즘은 교양과 세련이 어설픈 상태에 있는 것이죠. “스노비즘은 어떤 종류의 성질을 신성시하면서도 그것의 경험이나 사실에 있어서의 근거를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태도이다.” 김우창이 말하는 오늘날 시인이나 독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시의 구체에 대한 감정鑑定과 똑같이 또는 그것보다 오히려 더 절실히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시의 위치를 정립하는 일이기에, 김종길 비평이 더 끈질긴 비평적 추리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거죠.

 

시의 조건은 염결성이란 감수성이다. 그러면 염결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양식이나 지성과도 일치시켜서 생각되어 있는데, 대체로 일정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감각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김우창은 한 사람의 진실과 만인의 진실, 내용과 형식, 이러한 서로 적대관계 내지 긴장관계 속에 있는 것들이 시작품 속에서 하나로 녹아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시의 이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 정신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유교 유산의 문제를 다루면서 멋진 말로 정리해줍니다.

 

인간이 그의 정열에 어떠한 제한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대와의 함수관계에서 일어나는 하한의 논리로서일 뿐, 인간의 구극적인 추구는 윤리를 넘어서는 행복의 달성이며 또 시의 이상도 구극적으로는 이러한 삶의 순진한 표현이기 때문에 유고적 감수성이 그대로 삶의 상한적 표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했더니 열시가 다 되어갔죠. 무려 4시간 가까이 70년대 판 노안을 부르는 활자를 훑었더니 피로감이 파도처럼 덮쳐와 고마 책장 덮고 싶었으나 서정주 평론 너무 좋지 않더냐는 진스님의 간청에 따라, 발제자 불참으로 대신 제가 후다닥 일독하였습니다.

 

은유 : 서정주 - 구부러짐의 형이상학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옛날의 시들이 대개 나날의 삶의 너저분함을 배제하고 있는데, 미당의 시는 아니다. 시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혼연 일체를 이룬다. 미당 시의 효과는 일상의 일면을 새로운 각도에서 깨닫게 한다, 즉 우리 삶에 대한 시적인 탐구로 이어진다. 그 빼어난 예 우중유제雨中有題를 보자.

 

신라의 어느 사내 진땀 흘리며

계집과 수풀에서 그 짓하고 있다가

떨어지는 홍시에 마음이 쏠려

또그르르 그만 그리로 굴러가버리듯

나도 이젠 고로초롬만 살았으면 싶어라.

 

쏘내기속 청솔 방울

악으로 보고 있다가

어쩌면 고로초롬은 될 법도 해라.

 

김우창의 해석.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마음과 몸을 가장 열중하는 일 중 하나가 성행위다. 이러한 열중도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자기에 몰두하는 것이지만 조금 이질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몰두의 환상은 깨어지고 오히려 몰두 그것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중유제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갖는 전면 진실의 환상은 극히 조그맣고 엉뚱한 이질적인 요소에 의해서도 금방 깨져버릴 수 있다...그때 그때의 인생의 열중에서 보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느껴지지만, 조금만 달리 보면 사람은 삶이 열중으로부터 또는 삶 그것으로부터, 굴러 떨어지는 홍시 따라가듯 빠져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서정주에게 시의 세계와 속의 세계는 다르지 않다. 미당의 자연관은 단순한 낙관주의의 표현이 아니다. 그에게 자연은 평화와 위로의 출처가 아니라 -결여, 부족을 메우려는 몸부림으로서- 욕망의 과정이다. 자연과 인간이 다 같이 어떤 근본적인 충동, 그리움의 표현이다. 인간의 지혜는 자연의 유구한 리듬을 인간의 것으로 지녀 갖는 것이다.

 

이로써, 지난번 서정주 세미나 시간에 뽕밭이대근을 시발점으로 거시기한 분위기로 흘러가던 상황이 전혀 탈 맥락적인 이해나 낮은 수준의 억측이 아니었음이 드러났습니다.ㅎㅎ암튼 김우창의 정돈된 언어로 읽으니 서정주의 시가 더 깊이 있게 와 닿고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약하면 서정주의 시세계도 잘 표현된 불행이라는 것.

 

세상의 본질이 욕망이나 그리움이고 욕망은 어떤 형태로든지, 고통에 의한 변용을 통하거나 욕망 자체의 창조적인 자기 승화를 통하여서든지 달성되게 마련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미당 선생의 세계가 행복한 세계라기보다는 불행한 세계라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은재는 평론집을 당일에야 구하는 바람에 (알라딘 미배송, 반디앤루니스 바로드림 착오, 결국 이음서점에서 입수ㅋㅋ) 책을 조금 밖에 읽지 못했고 배가 살살 아파서 발표는 못하고 언제나처럼 든든히 자리를 빛내주었습니다.

 

 

★ GRACIAS

 

세미나를 마치고 나오는 길, 보송보송 눈이 내리더군요. 가로등을 불빛 아래 부서지는 눈의 헝크러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저 불안과 혼돈의 몸짓이 참 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를 읽는 동안 저의 마음이 저러했던 것 같습니다. 죽은 듯이 잠자던 생각이 부유하고 어지러워지면서 감각의 세포가 활성화 되곤 했으니까요. 그것은 필시 존재를 회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14개월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우정과 신의로 곁이 되어준 친구들, 진심 고맙습니다. 그대들 덕분에 토요일 오후가 외롭지 않고 슬프지 않고 심지어 많이 웃기까지 했습니다. 이 은혜는 살면서 차차 갚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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