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5.31] 김제동의 말
  2. [2015.08.18] 밥 (안)하는 엄마 (4)

김제동의 말

[은유칼럼]

“너희들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종족들이에요.” “무조건 남자들은 앞으로 살면서 여자 말을 듣고 산다 생각하면 중간은 간다.” “여자들이 불쌍한 남자 잘 보살펴 달라.” “사람이 아니고 개다 생각하면 싸울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인터넷에 떠도는 김제동의 강연 동영상 자막이다. 김제동은 ‘연애할 때 싸우지 않는 법’을 특유의 입담으로 설파하고 객석을 채운 선남선녀 커플들은 물개 박수를 치면서 박장대소다. 화기애애한 강연장 분위기를 보는 나는, 웃자고 하는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 쉰다. 

김제동의 말은 여성을 치켜세우고 남자를 비하하는 듯하지만 아니다. 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한 우주를 헤아리는 일이다. 친밀성 능력, 정서적·육체적 노동 다 투여된다. 두 사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왜 한쪽이 도맡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족도 학교도 못한 ‘사람 만들기’를 한 개인이 할 수 있을까. 왜 스스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고 관계의 무임승차를 권유할까. 

사실 김제동의 말은 새삼스럽지 않다. 최진실을 세상에 알린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유명한 광고 대사,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집안이 잘 된다”는 시어머니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남자 보살피는 것도 부족해서 집안 부흥의 책무(일명 ‘효도 대행’)까지 여자에게 부과하는 게 가부장제 일반적인 관습이고 정서다. 

“당신 좀 쉬어. 내가 할게.” “당신 수고 했어. 잘 먹을 게.” “당신은 엄마로서 교사로서 참 열심히 사네.” “당신 그런 것도 할 줄 아나. 대단하네.”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얼마 전 교사들 공부 모임에서 어느 교사가 쓴 글이다. 살면서 남편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라며 일일이 나열했다. 저게 뭐라고 처량하게 감정이입하는 여성들이 나 포함 많을 것이다. 결혼 후 아무 의심 없이 돌봄노동, 가사노동을 자처하고 헌신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아내이자 엄마로서 임무 수행이라고 여겼다. 문득 회의가 밀려온다. 왜 맨날 나야? 

20년 돌봄 노동을 그녀는 멈췄고 남편은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정희진)

그날 모임에서 김제동의 말을 들려줬다. 개념 있는 연예인의 말이니까, 남자는 애 아니면 개다는 익숙한 말이니까, 처음엔 맞다며 동조한다. ‘왜?’라고 의심하고 토론하면 각성이 일어난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던데) 내가 좀더 현명하게 남자를 이끌었으면 평등한 부부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자책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그렇게 알아간다. 사회 문제에 개입하고 약자 편에서 발언하는 미더운 방송인도, 좋은 삶을 위해 공부하는 여성 자신들도 가부장제 언어를 내면화하고 산다는 사실을. 내면화는 일상화라는 것을.

외부 강연을 나가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데 감응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느낌의 불모상태, 친밀성의 무능력을 호소하는 이들은 예외없이 남자 사람이다. 그런 질문이 반갑다. 무조건 남자를 보살피며 살지 않겠다는 여자들이 나타나고 있듯, 무조건 여자 말만 듣고 살아도 되던 남자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다.

‘여성이 상위 종족’이라는 명령은 권력의 말이다. 노동자를 산업의 역군이라 명명하(고 착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모든 사건과 사물의 질서를 정의하고 정리하고 판단하고 명령하는 마이크 권력이 줄어들고, 왜 맨날 나인가 회의하는 물음, 화장실 좀 맘 편히 가자는 일상의 억압을 증언하는 목소리가 흘러넘치길 바란다. 그럴 때만 남성의 조화로운 인격 형성을 방해하고 여성의 평화로운 일상 활동을 가로막는 가부장제 언어는 무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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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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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안)하는 엄마

[은유칼럼]



몇 년전 한 여성 소설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서울의 한적한 동네에 아담한 정원이 있는 단층 양옥집으로 찾아갔다. 거실 책꽂이 한칸에는 무슨 무슨 문학상 상패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집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은 주로 밤 10시부터 새벽 서너시까지 쓴다고 했다. 그에게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새벽까지 글을 쓰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 괴로웠던 터라 개인적인 질문이라며 아이 아침밥은 어떻게 해주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침밥 안 먹는 아이로 키우면 돼요.” 


그 초월적이고 독자적인 답변에 정신이 번쩍 났다. 그리고 곧 알아차렸다. ‘밥’의 탈을 쓴 저 사사로운 질문이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일해도) 살림한다는 이성애적 성별 분업 구도에 따른 ‘닫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창피하고 그만큼 부러웠다. 밥을 안 하는 것보다 밥 안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공표’할 수 있는 그 당당함이. 비록 아침식사에 국한하지만 요리와 육아를 거부하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엄마의 모습은 낯설고 기이하고 커보였다. 


같은 시기에 나는 어느 남성 평론가의 평론집을 읽었는데 서문 마지막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어머니가 해주신 밥 먹으면서 이 글들을 썼다. 어머니가 쓰신 책이므로, 어머니께 드린다.” 참으로 빤하고 오래된 각본처럼 진부했다. 어머니를 밥 하는 존재로 못 박는 듯해 갑갑했다. 7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의 현란한 문학적 수사와 이론적 분석의 글에 압도될수록 나는 어머니의 밥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이 정도 지적 과업을 달성하기까지 동시간대에 이루어졌을  700그릇 이상의 밥을 짓는 한 사람의 ‘그림자 노동’이 아른거렸다.  


‘어머니가 해주신 밥’라는 말은 완고하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환원하는 가부장제의 언어다. 인습을 의심하고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문학의 본령을 거스르는 말이다. TV 아침프로그램에 나오는 중년탤런트의 “아들 아침밥은 꼭 차려주는 며느리를 맞고 싶다” 같은 류의 발언에 더 가깝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자란 아이가 나중에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당연시할 확률도 높을 테니까 말이다. 아침밥 안 먹고 자란 아이는 (전문가들의 경고대로 학습력이 저하될 지언정) 아침에 해가 뜨듯 밥이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적어도 알지 않을까 싶다. 이걸 모르는 어른이 의외로 많다. 


요즘 집’밥’이 화제가 되는 걸 보면서 나는 오래전 저 어머니와 밥의 삽화들이 떠올랐다. 지금 나는 ‘아침 안 먹는 아이로 키우는 소설가 엄마’보다는 ‘밥 차려주는 어머니’에 해당하는 순응적인 일상을 겉으로는 살고 있지만 속으로는 끼니마다 회의한다. 나에게 밥은 집밥이냐 외식이냐, 레시피가 간단하냐 복잡하냐, 맛이 있냐 없냐가 아니다. 그 밥을 대체 ‘누가’ 차리느냐의 문제다. 최승자 시인이 시구대로 우리는 “채워져야 할 밥통을 가진 밥통적 존재”이고, 누군가 차리지 않은 그냥 밥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엄마들은 어디 효도관광이라도 가서야 “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매끼니 밥이 나오는 신비”를 경험한다. 그제야 맛본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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