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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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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누드모델 ‘나는 해부학적으로 그려져 걸릴 것이다/ 훌륭한 박물관에. 부르주아들이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겠지/ 이런 강변의 매춘부 이미지에 대고. 그들은 그걸 예술이라 하지.’ 영국 시인 캐럴 앤 더피의 일부다. 시의 화자는 누드모델. 자신에게서 ‘색을 뽑’고 움직임을 통제하며 권력 감정을 느끼는 화가를 ‘조그마한 남자’(little man)로 부르고, 누드화에 감탄하는 영국 여왕을 ‘웃긴다’고 말한다. 이 시에서 여성은 그려지고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다. 자신을 보는 화가-관객을 보는 시선의 전도로 인해 역사상 목소리를 가진 적 없는 누드모델이 견자(見者)로 등장한다. 친구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이탈리아에서 미술관엘 갔는데 길게 늘어선 줄이 거의 여성이더란다. 전시실엔 백인 남성 화가 작품들..
렌즈를 찾아라 아들이 시력이 나쁘고 난시가 심해서 하드렌즈를 낀다. 군에 갈 때 훈련용 안경, 생활용 안경 두벌을 가져갔는데 첫 휴가 나왔을 때 렌즈를 챙겨갔다. '사격'이 어려운데 렌즈를 하면 좀 나을까 싶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하드렌즈를 끼고 사격훈련을 받았는데, 오른쪽 눈에서 빠졌단다. 화들짝 놀라 왼쪽 눈의 것을 오른쪽에 끼고 훈련을 마친 다음 선임에게 말했더니 명령이 내려졌단다. "지금부터 렌즈를 찾는다. 한쪽에 20만원이다." 장정 10명이 엎드려 흙바닥을 뒤져서 렌즈를 찾아냈다고 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도 아니고 어떻게 가능한 건지. 하드렌즈는 신생아 엄지 손톱만한 크기에 투명하다. 아들에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찾아?" "그게 군대야. 엄마." 지난 토욜에 아들 부대개방행사를 다녀왔다. 이건 뭐 유..
돌려보내야할 것들 '본래 있던 곳을 잘 기억하고 있다. 궁극에는 돌려보내야 할 것이므로.' (문태준) 저 글귀를 얻고 기뻤다. 왜 사나, 자꾸만 올라오는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할 때 체념인듯 구원인듯 저 말이 다가왔다. 적어도 내가 받은 것만큼은 돌려놓고 죽자. 살아야할 이유가 삶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평생 내가 받은 보살핌, 관심, 동정, 지지, 호의, 사유, 선물 같은 것들. 그러니까 엄마에게 받아먹은 수천끼니의 밥, 동료에게 얻어먹은 커피와 술, 책에서 쏙쏙 빼먹은 문장, 선배가 찔러준 택시비, 우울한 날 당도한 기프티콘... 어제는 학인이 손수 담근 간장게장을 주었고, 지역에 사는 분에게 가을가을 엽서도 받았다. 받는 것의 목록이 늘고 있다. 수고로움을 거쳐 가까스로 돌아돌아 내게온 것들. 부지런히 되돌려 내어놓지..
[한겨레-삶의창] 내 인생이 그렇게 슬프진 않거든요 아이들이 이백 명 넘게 있더라, 생각해보니 나 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도 보육원에 사는 애가 없진 않았을 거 같아. 업무차 보육원에 다녀온 친구가 말했다. 그 아이는 반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못하고 남들처럼 부모형제와 사는 듯 지냈을 텐데 싶어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나와 같은 시간대를 통과했을 한 아이를 나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의 가슴은 때때로 얼마나 졸아드는가. 예전에 보육원에서 만난 취재원이 떠올랐다. 원생이 성인이 되면 약간의 생활자금을 갖고 시설을 나간다고 말했다. 난 좀 놀랐다. 방 한칸 구하기 어려운 소액으로 가족도 없는데 어떻게 자립을 하느냐며 살짝 분개했던 거 같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기가 그 경우랬다. 시설에서 살다가 스무 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