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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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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만나는 것들 승강기 버튼을 꾹 누른다. 맨 꼭대기인 18층까지가 출근길엔 더욱 더디다. 땡 하는 신호음을 기다리는데 옥상 문이 열리고 6층 아주머니가 낑낑거리며 화분을 들고 나온다. 하얀 국화꽃이 긴 모가지를 내밀고 소담소담 피었다. 집에다 두시려고요? 그럼. 내가 이 꽃을 보려고 봄부터 키웠는데 집에다 두고 봐야지. 최고의 가을 부자. 국화꽃 당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그리도 옥상을 드나드셨나보다. 1층 현관에는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바위처럼 몸을 웅크리고 계단 바닥을 연신 문지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중창으로 목례를 나눈다. 누가 음식물 쓰레기를 흘린 모양이라고, 하필 어제 손톱을 깎아 떼어지지 않는다고 당신의 뭉뚝한 손을 탓한다. 옆 동에는 오늘도 연희데이케어센터 차가 비상등을 켜고 서..
우연히 길담서원에서 첫눈 내리기 하루 전날. 수능 한파가 몰아친 날. 그러니까 겨울 초입에 서촌을 찾았다. 체부동에서 통인동 지나 옥인동으로. 예전 내 근무지. 점심 먹고 옷깃 동여맨 채 종종걸음으로 산책하던 그 길. 길담서원이 이사를 한 뒤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하다가 이날에서야 발을 디딘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찾고 나면 잘 보이지만 모르면 꼭꼭 숨어 있는 집. 등 뒤에서 나를 놀래킨 서점. 박성준 대표님 만나러 귤 한상자 들고 동료랑 동행했다. 이런저런 책관련 포럼의 자문을 구하기 위한 자리. 박대표님이 외부 일정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가끔 늦기도 하는 것은 좋은 거 같다. 숨 고르기의 시간. 이런 틈. 일상의 여백. 서가를 기웃거리면서 침을 꼴딱 삼켰다. 사고싶은 책이 너무 많..
만튀와 말하기대회 얼마 전 새로운 말을 접했다. 만튀. 분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오떡순(오뎅·떡볶이·순대)’ 같은 계열을 상상했다. 만두(와) 튀김의 줄임말? 아니다. ‘만지고 튄다’의 약자다. 여성의 특정부위를 만지고 튀는 행동을 뜻한다고 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여성의 몸을 만지고 달아나기를 반복한 김모군(18세)이 경찰에 붙잡혔다는 내용의 기사에서 처음 보았다. 관련 기사를 더 검색해봤더니 ‘만튀’라는 신조어는 이미 엉만튀, 가만튀 등 만지는 신체의 부위를 타고 괴물처럼 증식해버린 상태였다. 나만 너무 늦게 안 모양이다. 성희롱을 일상화하고 희화화 하는 말이 버젓이 일상에 매복되어 있었다. 언론은 천연덕스럽게 받아쓰기를 한다. 기사 말미에는 ‘장난삼아 하는 일이 범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
친구의 이별에 대처하는 법 - 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지난여름 친구가 별안간 이별을 겪었다. 동거하던 애인과 멀어지다 헤어졌다. 친구는 상실이 컸다. 늘 옆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 외롭고 허전하고 상대의 변심이 분하고 믿기질 않고 사탕처럼 녹아 없어진 사랑의 실체가 허무한 거다. 입맛을 잃어갔다. 사랑이 사람을 반짝반짝 생기 돌게 한다면 이별은 육신의 스위치가 하나둘 꺼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거의 3주가 되자 낯빛이 거무튀튀해지고 살이 쑥쑥 내렸다. 치마가 헐렁해져 주먹이 쑥 들어갔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할 말은 아니지만, 다이어트에 마음고생만한 게 없다는 말을 절감했다. 한 관계의 분리를 지켜보는 나는 무력했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게 개별자의 구체적 사건이 되면 의미와 기호로 가득한 작가주의 영화가 된다. 행복한 이유는 비슷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