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 최승자

[올드걸의시집]


 

그날 이후 나는 죽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후의 기술이다.
물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과장이다.
그렇다고 못 속아주는 분 또한
어엿한 바보이시다.
그러면 한 곡조 꽝!

저 강 저 벌판을 돌아
내 XX가 간다.
묻어다오, 헤매는 이 발목
흐르는 이 세계를,
묻어다오.
이런 시를 훌쩍이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그러나 나는 내 XX를 다 소비해버린
거디엇다.


- 문학과지성 신작 시집, 김현 編 <앵무새의 혀>




시집을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나도 시를 읽고 싶은데 무슨 시집부터 어떻게 읽으면 되느냐고.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시가 좋으면 시를 읽어야지 어쩌라고. 공무원 시험과목도 아니고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겠는가. 근데 사람들은 어느 시인의 어떤 시집을 짚어주길 원했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다보니 나는 요령이 생겨서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첫째 시집은 무조건 사라.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읽고 묵혀놨다가 다시 꺼내 봐라. 내가 바뀌면 시도 달리 읽힌다. 둘째 유명한 시인들, 기형도 이성복 황지우 김수영 고정희 최승자 최영미 등등 시인의 ‘첫 시집’을 반드시 완독해라. 날선 청춘의 열기가 훅훅 뻗친다. 시인이 나이가 들고 시선이 둥글어지면 시가 시시해진다. 옛날시집이 훨씬 좋다. 셋째 서점 시집 코너를 자주 가라. 손길 가는대로 한 권씩 빼서 읽어라. 맘에 들면 노트에 베껴 쓰고 그러다보면 내 취향을 알게 되고 정이 가는 시인도 생긴다. 시집을 무릎에 두는 시간이 많을수록 시랑 친해진다.

최승자 시인은 내가 서점탐사에서 발굴한 시인이다. 알고 보니 이름 난 분이었지만, 서점에 서서 뒤적이다가 반했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같은, 비린내 풍기는 시어라니. 예민한 존재인식과 절망적인 각성은 비명에 가까웠다. 시어는 거칠고 발칙했다. 굿판처럼 행간마다 기가 철철 넘쳐 읽고 있자면 은근히 생의 의지가 고양됐다. 그녀는 단어 하나를 쉽게 쓰지 않았다. ‘그날 이후’라는 시에서 XX에 얽힌 일화가 있다. 원래 단어는 청춘이라는 시어였다. 그런데 나이 먹어 청춘 타령을 하기도 그렇고 또 청춘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때 묻은 단어라서 다른 단어로 대치하려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어서 그냥 XX로 바꾸었다고 한다. 독자들이 맘껏 상상하라고. 그랬더니 남성시인 독자들 100%가 여성의 성적기관으로 읽었단다. 구질구질한 세상이라 한탄하셨다. 나중에 시집으로 낼 때는 청춘이라고 바꿔 표기했다.

슬픔이 너무 컸을까. 속세의 무리들과 분리된 채 동떨어져 계셨다. 한동안 시집을 내지 않았는데 11년간 심신쇠약과 정신분열증을 앓았다고 한다. 누가 알려줘서 기사를 찾아봤다. 그녀의 시어대로 ‘고장난 신호등’ 같은 불 꺼진 얼굴. 그래도 총기와 신기는 여전했다. 다섯 권의 시집을 내면서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봤다는 느낌이었다니, 광기어린 그녀라면 그럴 만 했다. 기초수급자이고 정신병원 신세인 시인의 말년이 가슴 시려왔으나 한편 다행스럽기도 했다. 자식들 알토란 같이 키워 유학 보내고 전원주택에서 콩 심고 텃밭 가꾸며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좋다는 잠언을 남기는 후덕한 노작가들과 비슷한 말년을 맞이하는 최승자 시인이었다면, 그것이 더 쓸쓸했을지도 모르겠다. 끝나지 않은 불같은 청춘. 정신병원이 유배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분명하다.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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