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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마침내 사는 법을 배우다

모처럼 한국을 떠났다 돌아온 다음 날, 문자 메시지가 왔다. “여행 중이신 거 같아 알리지 못했는데 이재순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뒤늦은 부고에 황망함이 몰려오자 그의 장례식에 찾아 뵙지 못한 죄스러움이 커져갔다.

 

이재순은 2016년 봄부터 한 지역 평생학습관에서 10주간 같이 공부한 학인이고, 지난 수년간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내가 만난 이들 중 최고령자다. 수업 첫날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나이가 많습니다. 일흔 살인데 결혼을 안 했고 자식이 없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담담한 자기 진술은 힘찬 빗줄기처럼 가슴을 두드렸고 그가 쓰는 글들은 사람은 왜 배워야하는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기에 난 그의 사연을 『쓰기의 말들』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췌장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나는 옛 게시판을 뒤져 그가 쓴 글들을 추려서 찬찬히 읽어보았다.

 

이재순은 세 살 때 홍역을 앓았다. 부모님은 이미 아이 셋을 홍역으로 잃은 뒤였기에 포기하고 윗목에 밀어두었는데, “엄마” 하고 모기만한 소리로 불러서 살아났다. 그에게 유년 시절은 전쟁 직후로 몹시도 가난했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건강한 시절은 오직 그 때 뿐이었으니까.”

 

10대부터 수난이었다. “딸인 나를 중학교에 보내면 아들인 동생을 중학교에 못 보낼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발광을 떨며” 단식투쟁으로 맞섰고 어머니와 외삼촌의 도움으로 중학교 입학금을 겨우 마련했다. 그러나 류머티즘 관절염이란 병이 공부의 앞길을 막았고  관계의 끈도 헝클어버렸다. 중3 때, 아픈 다리를 간신히 이끌고 학교에 가던 길이었는데 또래의 동네 남자아이가 절룩거리는 모습을 흉내 내며 계속 따라왔다. “너무나 화가 나서 그놈을 잡아 죽이고 싶었다.”

 

고등학교 진학은 언감생심, 긴 투병이 시작됐다. 변변한 치료법을 찾지 못하던 그 시대에 병을 고쳐보겠다고 “무당들과 한 달 동안 함께 기거하며 굿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부적을 불에 태워서 그 재를 먹기도 했고, 때로는 동네 두더지란 두더지는 다 잡아서 약탕에 고아 먹기도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올바른 진단과 치료를 받고 겨우 걸음을 걸었다.

 

세월이 흘러도 공부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60대로 접어든 어느 해 “아픈 몸으로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학력란에 당당하게 ‘고교 졸’이라고 쓸 수 있다는 기쁨”에 만족하지 않고 사이버대학에 진학했으며 한의학 공부를 2년 마치고 사회복지학과로 전과하여 2급 복지사 자격증까지 받았다. 배움의 길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어 평생학습관에까지 다다른 그는 공부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나의 60대의 공부는 출세보다는 못다 꾼 꿈을 이루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사람들과의 만남이 더 중요했다. 그 속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공부란 끝이 없이 사람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답게 사는 방법의 탐구로서의 배움. 그것은 그가 생소한 책도 거부 없이 척척 읽어낼 수 있었던 비결이다.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고, 그는 영국의 탄광노동자들에게서 “연탄가루 묻혀가며 일하시던 아버지의 삶”을 본다. 아버지의 노동이 얼마나 고달픈 줄 몰랐고 그냥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자책, 아버지가 12세에 부모님 잃고 고아로 살아왔으니 ‘그 얼마나 고독하셨을까’ 하는 생각은 “내가 나이 들어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탄식, 얼굴에 시커먼 가루를 묻힌 모습으로 “재순아, 이거 먹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하시며 쇠고기 한 근 사오시던 그날의 모습을 선연히 그려낸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고는 수치심의 정의를 확장한다. 다리 수술을 하기 전엔 항상 절룩거렸고 힘든 걸음걸이보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늘 수치심으로 다가왔는데, 이 책을 읽고 “자잘한 감정의 수치심”이 아닌 “더 큰 수치심”을 깨닫게 되었다며 쓴다.

 

“(세월호 사건 때) 마음으로만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고 생각했으며 한 번도 그들이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내 몸의 건강이 따라 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들이 울부짖고 있을 때 그들의 곁에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준 적이 없었다.”

 

평생 아픈 몸을 살았다.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자기 고통에 매몰되어왔기에 타인의 고통을 좀처럼 보지 못했음을 그는 뒤늦게 자각하고 반성했다. 하지만 그토록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살아온 그이기에 배제와 차별, 불의와 불공정에 대한 남다른 예민함으로 읽고 쓰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단어 하나 잣대 삼아 자기 생각의 크기를 재어보고, 책 한권 거울 삼아 자기 일상의 태도를 점검했던 그의 영전에 나는 책 한 권 놓아드리고 싶다.

 

강남순의 『배움에 관하여』. 이 책에서 저자는 비판적 성찰을 일상화하여 삶의 주변을 들여다본 배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행간마다 수시로 출몰하는 이재순의 얼굴과 대화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책을 함께 읽었다.

 

“어떤 특정한 조건들이 충족되는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정황들에서라도’ 한 사람의 내면 한 귀퉁이에서 저렇게 잎사귀가 나올 수 있게 하는 힘”(35쪽) 그 끈질긴 희망의 줄기, 그것은 차가운 윗목에서 간신히 살아나 끈질긴 희망의 줄기를 틔워낸 그의 삶에 관한 메타포가 아닌가. 이재순은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형성 중의 존재’”로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정원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키”(137쪽)웠다. 

 

옛 게시판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수업 후기다. 평생학습관에 등록하던 날의 에피소드가 적혔다.

 

“글쓰기 수업을 신청하겠다고 하자, 학습관 담당자가 ‘이 프로그램은 감응의 글쓰기인데요?’ ‘저도 알아요. 신청해 주세요.’ 담당자가 나이도 많고 헙수룩한 내 모습을 보고 그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따라갈 수 있을까 미리 염려를 했던 모양이다. 순간 기분이 상했지만 두려움도 있었다. (...) 나의 삶은 병에 갇혀서 넓은 세상을 보면서 살지 못했는데, 여러 학인님들의 폭넓은 삶을 내 마음에 담아가니 나는 큰 부자가 되었다는 뿌듯함에 시간이 끝나는 게 아쉬웠다.”

 

첫 시간에 정한 이재순의 닉네임은 ‘함께하는 즐거움’이었다. “‘살아감이란 함께 살아감’이라는 심오한 존재의 철학”(182쪽)을 이미 삶으로 체화한 그였기에 자신을 낯선 자리에 개방했으리라. 내가 만일 일흔 살에 살아 있다면 어느 자리에 누구와 함께 있을까. 나보다 삼사십년 아래인 젊은이들이 모여 있고, 읽어본 적 없는 책을 읽고 써본 적 없는 글을 쓰는 그런 “변혁적 배움”(9쪽)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나는 가슴 펴고 문 두드릴 수 있을까.

 

한 해 한 해 나이 들고 자꾸만 굳어가는 생각과 관계, 익숙한 자리에 안주하려는 나를 그의 온 삶이 일깨운다. 『배움에 관하여』에 나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가 죽기 3일 전 스스로 작성했다는 장례식 조사를 나는 고인이 세상에 보내는 유언으로 마음에 새긴다.

 

“언제나 삶을 사랑하고 생존하여 살아냄을 긍정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157쪽)

 

* 채널예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