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파파충과 노아재존은 왜 없을까

[은유칼럼]

이른 아침 카페에서 노트북 켜고 일하고 있으면 공무원시험 준비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들어오고 오전 10시 무렵엔 유모차를 민 엄마들이 등장한다. 민소매 원피스 차림의 젊은 엄마들은 커피를 마시며 아기가 자는 틈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책장을 넘기다 아기가 깨면 분홍색 플라스틱통 뚜껑을 열어 이유식을 먹인다. 새끼손가락만 한 수저가 아이 입에 들어갈 땐 내 입도 덩달아 벌어진다. 숨 붙은 것들 입에 밥 들어가는 장면은 왜 볼 때마다 울컥한가. 


나도 양육기에 어딜 가든 꼭 이유식을 싸갖고 다녔다. 잘 먹어야 잘 자니까, 잘 자야 엄마도 쉬거나 집안일을 하니까, 하루의 흥망성쇠가 달린 아기 밥은 중요했다. 한번은 친정에 갔을 때 아이에게 찐밤 으깬 것을 꺼내 먹이는데 그것을 본 엄마 친구가 말했다. “너 어릴 때도 엄마가 그렇게 키웠다.” 순간 움찔했다. 그간 여성의 돌봄노동에 무지한 사회를 규탄하기만 했지 내가 돌봄노동의 산물이란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다. 나를 포함해 누구나 한때 밥을 받아먹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혐오와 낙인은 여성과 아이 몫


한쪽은 최대한 몸을 굽히고 한쪽은 최대한 입을 벌리고, 먹고 먹이는 저 간절한 풍경이 혐오의 빌미가 되고 있다. 언제부턴가 엄마와 아이에 대한 사회 일각의 시선이 곱지 않다. 음식점에서 아기 똥 싼 기저귀를 간다더라, 물컵에 소변을 받는다더라 하는 말들이 괴담처럼 돈다. ‘맘충’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음식점에서 이유식을 데워 달랬다더라, 어린이 메뉴 시켜놓고 공짜밥을 요구한다더라 등 맘충의 악행 목록은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이 육아의 아수라장에 남성은 없다. 현실에선 아기띠 매고 유모차 미는 아빠들 모습은 어딜 가나 흔하다. 음식점, 마트, 유원지, 촛불집회에서도 자주 목격한다. 드물게 아이를 등원시키는 육아휴직 중인 아빠도 있다. 그렇지만 ‘파파충’은 없다. 남녀가 같이 낳고 같이 키워도, 아니면 엄마 혼자 ‘독박육아’에 외로이 시들어가도, 공동체를 오염시키는 존재로 낙인찍히는 대상은 여성이다. 


아이들도 안전하지 못하다. 특정 연령 이하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존’이 생겼다. 아이 혼자 카드 들고 외식할 일은 없을 테니 이는 엄연히 맘충-엄마-여성에 대한 장소적 제약이고 혐오의 사회적 확장이다. 노키즈존이 조용히 식사할 권리, 시공간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위해 생겼다는데 그것은 한 대상을 차등 대우할 공적 근거가 될 수 없다. 공공장소에서 타인의 시공간을 침해하는 존재가 아이뿐인가. 타인의 시공간을 침해하지도 않고 침해받지도 않고 살 재간이 있는 자는 누구인가.


동물적 삶의 연속성 혐오하는 남성


나는 여름내 더워서 창문을 열어놓았다가 트럭 방송 소리에 시달렸다. 해풍에 말린 법성포 굴비가…, 복숭아 복숭아 꿀복숭아…, 고장난 컴퓨터 냉장고 에어컨 삽니다…. 업종을 달리한 트럭 장수가 번갈아 찾아와 정신을 강탈해 읽고 쓰기 어려웠다. 카페에 가도 사람이 있다. 운수 나빠 친목모임 일행이나 과외하는 팀이 주변에 있으면 그날 작업은 공친다. 버스나 지하철, 기차에선 ‘쩍벌남’이라도 만나면 가는 내내 불쾌하고 불편하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 학인들에게 노동 르포를 써오게 하는데 단골 등장인물이 중·장년 남성이다. 주로 가해 캐릭터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카드를 휙 던지고, ‘딸 같아서’ 이름을 부르고 만지고, 비닐봉투값 20원을 왜 받느냐고 목청을 높인다. 은행이나 우체국 창구에서, 역 대합실에서 ‘이게 왜 안 돼’ 억지를 부리고 음식점에서 술에 취해 난동 피우는 중·장년 남성들의 면면은 익숙하다.


저마다 누려야 할 고요와 기분을 방해하는 집단의 출입을 금지해야 한다면 노키즈존보다 ‘노아재존’이 시급하다. 그러나 생기지 않았고 생기지 않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는 곧 법이고 돈이다. 생산력과 구매력을 가진 집단이기에 은행에서도 음식점에서도 그들을 함부로 금지하거나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역사상 흑인 전용 화장실은 있었지만 백인 전용 화장실이 없었던 이유와 같다. 


우리는 왜 어떤 대상을 혐오하는가. <혐오와 수치심>을 쓴 마사 누스바움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회는 사람이나 대상을 서열화해 특정 대상을 저열하고 천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 밑바닥에는 자주 유대인이나 여성이 있었다. 특히 여성은 출산을 하기 때문에 동물적 삶의 연속성, 몸의 유한성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이는 관조와 초연함을 이루려는 남성의 계획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런 여성에게 남성은 혐오로 반응하면서 자신이 간직한 동물성에서 멀어지려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노키즈존이 여성혐오의 부산물이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아무 데서나 똥 싸고 밥 먹고 울고 떼쓰는 아이와 한 몸인 여성, 그 불결하고 불완전한 대상으로부터 완벽한 차단과 분리라는 생의 기획을 아무나 도모하지 않는다. 노키즈존은 이른바 ‘꼰대’로 불리는 중·장년 남성이나 이기적인 젊은이들만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나이·성별과 무관한 학습된 혐오다. 자본주의보다 더 오래된 가부장제 역사에서 여성을 타자화하며 유지돼온 남성 중심 세계관을 내면화한 기성세대가 저지르는 사회적 경계 긋기의 폭력이다. 


당신도 한때 아이였다


최근 왁싱숍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또 여자라서 살해당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한 여성이 시끄럽게 울고 보챈다며 4개월 쌍둥이 아들을 코와 입을 막아 숨지게 했다. 그는 어린아이 셋을 홀로 키우면서 심한 우울증을 겪었고 “아이 셋이 너무 울어 이웃집에서 뭐라 그럴까봐 걱정됐다. 순간 내 정신이 아니었다”며 뒤늦게 후회한다고 기사는 전한다. 이 사건 또한 여성혐오 사회의 비극이라고 본다. 노키즈존은 음식점의 경계를 넘어 이미 사회 구성원들 의식에 그어져 자체 검열 기제로 작동한다. 아이 울음소리에 달려올 이웃은 없고 아이 울음소리에 민폐를 우려하는 팍팍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양육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에서 오는 적대가, 아이 셋을 키우며 느꼈을 피로와 고립과 만나 끔찍한 폭력을 낳은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공통의 인간성에 내재된 취약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 있는 사회”를 이상으로 꼽는다. 그의 말대로 세상은 통제할 수 없고 우리 모두는 한때 떠먹여주는 밥을 먹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노키즈존이란 혐오의 언어가 폐기되고 약한 존재를 품는 인정(人情)의 언어가 고안될 수 있지 않을까.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저자



한겨레21에 실림.  (21에서 노키즈존 특집을 기획하는데 세바시 강연 내용 보완해서 글을 써달래서 썼는데 제목이 저렇게 자극적으로 나가서 좀 민망했다. 노아재존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어른도 자신들 모습을 보란 얘긴데 논의가 적대적 구도로 흘러버린다. 그보다 나는 기사 말미에 인용된 세 아이의 엄마가 아들 숨지게 한 사건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애 키우는 게 지옥이 됐다. 관계는 고립되면 서로를 해친다. 노키즈존이 사라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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