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수만큼 우리는 돈을 번다

[은유칼럼]
개강 후 두 번째 수업에 과제 발표자가 결석했다. 과제 부담일까, 개인 사정일까. 궁금한 마음에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저, 오늘 안 오셔서 연락드렸어요.” “네? 지난주에 수강 취소하고 환불받았는데요.” 예기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나는 전달을 못 받았다며 얼버무리고 끊었다. 문자로 남길 걸 괜히 전화했나. 불편한 상황을 만든 나 자신을 책망했다.

그날 전화를 끊고 수업을 잘 마쳤다. 집에 가는 길, 얼마 전 통신사 해지방지팀에서 일하다가 자살한 현장실습생이 떠올랐다. 취소·환불이란 말들이 귓속으로 여과 없이 파고드는 따가운 경험. 나는 20초 정도의 짧은 통화였는데도 가슴에서 휑한 무엇이 자꾸 올라왔다. 만약 그게 온종일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 사람의 삶은 어떻게 될까. 더구나 경험의 군살이 붙지 않았을 열아홉 살 사회 초년생이라면 말이다.

미국 빈민 여성의 생존기이자 노동 르포르타주인 <핸드 투 마우스>의 저자 린다 티라도는 말한다. “나는 내 상처의 수만큼 돈을 번다(49쪽).” 베이고 데는 상처만 뜻하는 게 아니다. 짜증, 분노, 무시 같은 것도 독처럼 쌓여서 영혼을 부식시킨다. 필자는 병원에 가면 ‘스트레스를 줄이라’는 처방이 내려지곤 한다며 말한다. “의사들은 잠을 잘 자고 잘 먹으라고 환자에게 말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마치 그게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88쪽).”

ⓒ윤성희
4월12일 서울 동대문종합시장에서 한 지게꾼이 원단을 짊어지고 운반하고 있다.

늘 단순한 상황 판단은 타인의 구체적 처지에 대한 고려 없음에 기반한다. 나도 전적이 있다. 큰애 세 살 즈음 육아로 후줄근해진 내 청춘을 보상받기 위해 옷을 샀다. 단정한 모노톤 셔츠였다. 여름철이라 한 번 입고 세탁소에 맡겼다. 일주일 넘게 감감무소식. 세탁물 수거하는 직원에게 문의했더니 이동 중에 분실했단다. 이튿날 그 직원은 5만원을 내밀었다. 옷값의 절반이다. 그러곤 사장에게 분실 건을 말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개인 부담으로 배상을 받는 게 영 찜찜했지만 새 옷을 잃은 속상함에 묻혀 금세 잊었다.

몇 년 후, ‘뭐라도 좋으니’ 일해야 했을 때, 자유기고가로는 수입이 불안정해 친척 회사의 경리 업무를 도왔다. 6개월가량 서울 동대문종합시장 매장을 드나들었는데 그곳은 이전에 쇼핑하러 갈 때와는 다른 장소였다. 민속촌에서나 보던 지게에다 돌돌 만 원단을 가득 쌓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늙은 지게꾼을 목도했다. 복도에는 보험회사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 커피와 음료를 배달하는 사람들이 오갔다. 길가로 나오면 오토바이 택배 기사가 십자가처럼 원단을 지고 위태로운 질주를 했고, 지하철 입구에선 아주머니가 빠른 손놀림으로 전단을 안겼다.

<핸드 투 마우스>
린다 티라도 지음
김민수 옮김
클 펴냄
세상은 노동하는 육체의 전시장! 그때 불쑥 그 세탁소 직원이 떠올랐다. 나는 어떻게 했어야 옳은가. 그의 과실이지만 고의 과실은 아니다. 피해보상 규정 같은 노동자의 보호책을 마련하지 않은 고용주, 합리와 효용의 잣대로 따지는 깐깐한 소비자, 그 사이에서 가장 약자인 피고용인이 피해를 입었다. 내가 ‘챙긴’ 5만원이 그의 식비이거나 노모의 약값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딱히 소비자 권리를 내세운다기보다 자기중심으로 사고하고 내 몫 지키기에 급급했다. 대안공동체에서 공부할 땐 인문학 소비 풍토를 비판했다. 문화센터 같은 즉자적인 지식 거래가 아닌 다른 관계, 다른 속도, 다른 일상을 발명해야 한다고 그럴듯한 말로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게 평생 견적이라는 걸 몰랐다. 나는 소비자이면서 노동자라는 다층적 위치성에 대한 실감이 모자랐다. 이제 목표는 소박해졌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이들의 유니폼 너머, 표정 너머, 계산 너머 삶의 면모를 그려보기. 잘 자고 잘 먹는 사람이 드문 세상이니만큼 이 책의 저자처럼 “나는 사람들이 생계로 삼는 일을 더 힘겹게 하지는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려고 애쓴다(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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