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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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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화장도 안 하고 다니다간 피부 망가진다는 경고를 20대부터 들었다. 내 딴엔 스킨로션을 바르고 분첩을 두드린 건데 그랬다. 뭘 어떻게 덧발라야 화장한 티가 나는지, 자외선이 차단되는지 알지 못했다. 확 망가지지도 않고 쫙 피어나지도 않고, 피부는 제 나이를 야금야금 먹어갔다. 피곤하면 뾰루지가 나고 뾰루지를 뜯으면 착색이 됐다. 새살이 돋지 않고 어엿한 잡티로 남았다. 세포 재생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어느 날 자고 나니 오른쪽 눈가에 콩알 만한 얼룩이 생겼다. 자고 나니 책에 누운 글자가 흐릿해지던 즈음이다. 혹시? 이건 할머니 손등이나 얼굴에 나는 건데 난 ‘아직’ 40대이므로 설마했다. 노안이란 말을 그랬듯이 그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거슬렸다. 내게 ‘화장하라’던 조언자 ..
그렇게 장애인 아버지가 된다 지하철 객차에서 장애인 아들과 비장애인 아버지를 보았다. 건장한 성인 체격의 아들은 천진난만한 어투로 목청껏 떠들고 크게 웃었다. 주변의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금만 작게 말해달라고 타일렀다. 자상한 눈빛이었다. 부자지간의 대화가, 그들의 외출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다. 직업정신인데, 무수한 이야기가 깃든 얼굴, 자기정리가 된 듯 편안한 기운에 끌렸다. 어떤 일로 웃는지, 속상한지, 불편한지, 실망하는지, 어떻게 기운 차려 하루를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매스컴에 소개되는 동정과 차별의 대상인 장애인 말고 다른 이야기들, 지하철 한 칸에 섞여 타는 동료 시민으로서, 애 키우는 같은 부모로서 사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도 장애인 아들을 두었다. 오..
기록되지 않은 전태일을 기록하며 1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가 모인 글쓰기 수업에서 을 읽을 때면, 그의 생애 만큼이나 뜨겁고 척척한 말들이 오간다. 감응의 지점이 세대별로 조금씩 다르다. 60대는 ‘신발에 물이 새지 않으면 다행인’ 찢어지는 가난에 좀 더 공감하고 40~50대는 ‘비참한 현실을 바꿔내는’ 집요한 싸움에 반응한다. 20~30대는? 가장 열렬하다. 전태일이 그리는 생생한 노동 현장 실태에 맞장구 치며 목소리를 높인다. “월급 받아도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전태일 말이 그때나 지금이나 틀리지 않구나 싶어요.” “먹고 살길이 막막한 젊은이들이 서울로 몰린다는 것도요.” “노동력으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는 문장이 팍 와 닿아요.”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
한겨레 기고 - 반도체 소녀의 귀향 공유프린트크게 작게영화 을 보는 동안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일본군의 (성)폭력으로 인한 비명과 무자비한 총성이 길고 셌다. 무구한 소녀와 잔인한 일본군의 선악 대비, 그 단순한 서사의 프레임은 생각을 몰수하고 통증을 일으켰다. 이런 궁금증이 남았다. 왜 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범하고 죽이게 되었는가. 존재를 침범당한 인간은 또 어떻게 존엄을 추스르고 일상을 살아갔는가.극장을 나와 핸드폰을 켜니 문자가 와 있었다. 내일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알린 고 황유미씨의 9주기 추모제가 열린다는 내용이다. 아, 은 끝나지 않았구나. 여기에 또 하나의 악이 있고, 또 하나의 기막힌 죽음이 있고, 귀향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소녀상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묵직했다. 이튿날, 서울 강남역..
본분과 전혜린 ‘본분’이라는 말, 이 쿰쿰한 냄새 피우는 단어의 옷을 공교롭게도 ‘여자 아이돌’이 입고 나타났다. 설 연휴에 KBS 2TV에서 ‘본분 금메달’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됐고 제목 그대로 누가 더 여자 아이돌의 본분에 맞는가를 겨루었다. 가령 모형 바퀴벌레를 던져놓고 얼마나 예쁘게 놀라는지,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도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는지, 프로필상 몸무게와 실제 몸무게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등의 테스트를 거친 후 총점을 매겨 무슨 올림픽처럼 금메달을 수여했다. 방영 후 ‘아이돌 괴롭히기’라는 논란이 일고 ‘눈살 찌푸리게 한다’는 시청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럴 만했다. 본분本分. 본래의 직분에 따른 책임이나 의무를 진다는 뜻이다. 이 행실 바른 말의 숨은 폭력성을 저 프로그램은 여실히 드러냈다. 학생의 본분..
딸이니까 , 지난 설에 친정에 들러서 저녁 준비를 했다. 나는 싱크대에 붙어서 쌀을 씻고 전을 부쳤고 아버지는 거실에 놓인 상을 정리했다. 평소 네모난 교자상에 신문이며 우편물, 성경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아버지는 우리 식구가 오면 거기서 밥을 먹기 위해서는 상을 치운다. 그날도 주섬주섬 물건을 내려놓더니 당신 손녀를 불렀다. "행주 갖다가 닦아라." 그리고 그 상에 둘러앉아 다같이 밥을 먹었다. 식사 후 그릇들과 물컵, 남은 반찬을 남편이 나르고 상을 치우는데 아버지는 또 손녀에게 물 가져와라, 컵 가져오라며 이것저것 시켰다. 부엌에서 일하는 나는 그 말이 점점 귀에 걸렸다. '왜 딸아이를 시키지..'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며 참고 있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야, 행주로 상 닦아라." "아니, 왜 ..
여가부에서 온 우편물 여성가족부에서 우편물이 왔다. 24세 남자의 무표정한 정면 측면 얼굴과 전신 사진, 주소, 범죄 사실이 담긴 ‘고지정보서’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른 것으로 성범죄자가 사는 인근 지역에 보내진다고 했다. 성범죄자 재발 방지 대책이라는데 그 우편물은 안도감보다 불쾌감만 키웠다. ‘이웃을 조(의)심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이런 행정 조처는 변죽만 울리는 꼴이다. 골목길에 나타난 범죄자라는 편견을 강화해 집안이나 사무실에 ‘상주’하는 가해자를 못보게 한다. 성범죄자는 낯선 남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간 공적 사적으로 만난 성폭력피해여성들의 가해자는 거의 친족, 직장 동료, 고용주, 교사, 친구 같은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를 예비하지 않았으니 피해를 입고도 그것이 성폭..
바닷마을 다이어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밥이 있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아버지)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이웃 아줌마) 장례식으로 끝나는 수미쌍괄식 구성이다. 검은 상복의 여인 네 명이 주인공. 15년 전 집을 나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통해 만나게 된 이복 여동생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다. 바닷가 마을과 집이 주무대인데 잔멸치 덮밥, 카레 등 식사 장면이 많이 나와 군침을 돌게 하니 이 작품을 ‘먹방 영화’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내게는 ‘죽음과 죽음 사이에 밥이 있다’는 것을 환기하는 가족 영화로 다가왔다. 이 영화는 없음으로 채워진다. 다른 가족에겐 있는 것이 이들에겐 없다. 우선 완전한 악인이 없다. 아빠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중심의 이성애 가족의 기본 프레임을 따르나, 부양의무를 진 아빠와 남편 뒷바라지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