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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한겨레 기고 - 반도체 소녀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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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향>을 보는 동안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일본군의 (성)폭력으로 인한 비명과 무자비한 총성이 길고 셌다. 무구한 소녀와 잔인한 일본군의 선악 대비, 그 단순한 서사의 프레임은 생각을 몰수하고 통증을 일으켰다. 이런 궁금증이 남았다. 왜 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범하고 죽이게 되었는가. 존재를 침범당한 인간은 또 어떻게 존엄을 추스르고 일상을 살아갔는가.

극장을 나와 핸드폰을 켜니 문자가 와 있었다. 내일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알린 고 황유미씨의 9주기 추모제가 열린다는 내용이다. 아, <귀향>은 끝나지 않았구나. 여기에 또 하나의 악이 있고, 또 하나의 기막힌 죽음이 있고, 귀향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소녀상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묵직했다. 

이튿날,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본사 앞을 찾아갔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150일째 농성 중이었다. 기나긴 풍찬노숙엔 이유가 있다. 지난 1월 언론에선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보상 마침내 마무리’라는 기사가 쏟아졌으나, 겉과 속이 다르다. 삼성전자는 독립된 사회적 기구가 아닌 독자적 사내 보상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러곤 가해자인 자기들이 직접 보상을 진두지휘했다. 산정기한을 정해서 피해자들을 압박하고, 합의사항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라는 각서를 발송했다. 사과도 형식적이다. 삼성의 부실한 안전관리 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조정권고안의 내용은 쏙 빼고 “아픔을 헤아리는 데 소홀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한마디로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아프다니 유감이다’라는 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풀어야 할 거대한 의문부호다. 삼성은 왜 저 푸르스름한 건물 유리처럼 차가운 얼굴을 갖게 되었나. 직업병 사망자 76명과 암환자 223명이 나왔는데도 왜 눈물 흘리지 않는가. 죽음의 공장인 삼성이 어떻게 세계 일류 기업의 칭호를 누리는가. 삼성은 아는 것 같다. 영화 <귀향>의 일본군처럼 삼성은 한국 사회의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독한 화학약품의 생산라인에 사람을 방치하여, 죽이지 않고 죽게 내버려둔다. 돈 몇 푼 쥐여주고 조용히 죽음의 흔적을 치워버린다. 언론은 삼성 편이다. 대학생이 들어가기 원하는 1위 기업의 위상은 굳건하다. 어떤 짓을 해도 어떤 저항에도 부딪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폐쇄적이고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 체질을 만들었으리라. 

황유미는 열아홉에 속초에서 관광버스 타고 삼성반도체 기흥 공장에 들어갔다가 백혈병을 얻어 스물셋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의 고인은 왜 아파야 하는지 몰랐다’는 기자회견문에서 영화 <귀향>의 소녀의 대사가 겹친다. 트럭 타고 일본군에 끌려온 열다섯 소녀도 몰랐다. 그래서 묻는다. ‘여기가 어디예요?’ 일본군은 질문하는 소녀의 입을 후려쳤다. 황유미 추모제가 열리는 날 삼성전자는 본사 앞에 펜스를 쳤다. 말하는 자, 감히 알려고 하는 자를 저들은 몹시도 겁낸다.

은유 작가
은유 작가
9년 사이, 말이 쌓여 질문이 되고 진실이 드러났다. 황유미의 산업재해가 행정법원에서 인정됐다. “왜 네가 병에 걸렸는지 원인을 밝혀내겠다”던 약속을 아버지 황상기씨는 지켰다. 세상으로 나온 또 다른 유미들이 매일 강남역 삼성전자 앞에서 이어 말하고 있다. 삼성이라는 악에 대한 증언에서 나아가 저들의 비열한 횡포에 맞서 어떻게 분투했는지, 일상을 파괴하는 고통과 분노에 익사당하지 않고 타인에게 관심을 넓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고통이 알 수 있는 고통이 되기까지 어떻게 싸웠는지…. 오가는 행인의 발걸음을 붙들어 세우는 그 뜨거운 이야기들은, 반도체 소녀들의 ‘귀향’이다.

은유 작가


* 고 황유미 9주기를 맞아 언론사 릴레이 기고에 참여했습니다. 한겨레 3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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