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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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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 은유 읽다 -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엄마는 생일날 우리랑 안 있고 왜 친구 만나러 가?” 아이가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면접에 임하는 사람처럼 성심껏 답했다. 우리는 매일 밥을 같이 먹고 외식도 자주 한다. 근데 생일에도 가족이 꼭 함께해야 하는 걸까. 엄마는 아빠나 너네들이랑 같이 있으면 자꾸 일하게 된다. 동생이 어리니까 밥 먹을 때도 반찬을 챙기게 되고 신경이 쓰인다. 일상의 연장이고 특별하지 않다. 엄마도 생일에는 마음 편히 보내고 싶다고. 나는 첫아이를 저렇게 질문이 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둘째를 낳았다. 6년 만에 재개된 육아는 겨우 정돈된 일상을 쉽게 뒤집어버렸다. 내 일이 바쁠 때면 두 아이 손발톱 40개가 꼬질꼬질한 채로 자라 있곤 했다. 늘 동동거리느라 혼이 빠진 나는 ..
삶의창 - 나, 다니엘 블레이크 따라하기 를 두 번 봤다. 켄 로치의 마스터피스로 꼽히는 만큼 훌륭함으로 꽉 찬 영화지만 난 등장인물들이 같이 다니는 장면에 눈길이 갔다. 주인공 다니엘은 40년 경력의 늙은 목수, 케이티는 아이 둘을 키우는 한 부모 가장이다. 둘 다 관료화된 복지제도의 희생양으로 관공서에서 우연히 조우했다. 처음 만나서부터 허름한 집에 따라가고 소소한 도움을 주고받다가 무료 식료품 보급소나 질병수당 항고심이 이뤄지는 법원 등 비참함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운명의 극장’까지 동반 입장한다. 그냥 같이 따라가는 것. 혹은 가 ‘주는’ 것. 간다는 행위의 조건 없는 증여. 딱히 임무가 없었지만 가면 할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 어찌할 도리는 없으나 그냥 옆에 앉아 있는 것. 이 무위의 동행은 일상을 분 단위로 쪼개 생산성을 추구하..
갈아입는 엄마의 옷 올해 내 인생 사건은 군인 엄마가 된 것이다. 지난봄 아들이 군에 간 뒤 앎과 감각이 바뀌었다. 군 의문사에 관심이 가고 참사·재난 기록문학이 다시 읽힌다. 대북 관련 뉴스가 귀에 박히고 뿔테 안경 쓴 앳된 군인이 자꾸 보인다. 거리에 군인이 이렇게 많았나 새삼스럽다. 민간인 청년들이 재잘거리며 노는 모습이 예쁘다가도 10㎏짜리 군장 들고 행군 중인 아들 얼굴이, 부르튼 손이 겹쳐 울컥한다. 이런 심정을 토로하면 주변에서 위로한다. 국방부의 시계도 돌아간다고. 아들 입대 4일 후, 구의역 참사가 발생했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 사이에 끼여 숨진 청년노동자의 처참한 죽음에, 사고의 원인을 고인 과실로 몰아가려던 원·하청 업체의 비겁한 처사에, 고인의 가방에 나뒹굴던 사발면과 쇠수저에 국민적 분노와 슬..
말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촛불 집회는 수업을 마친 후 학인들과 동행한다. 20대부터 50대까지 삼삼오오 몰려간다. 일전에 문화공연에 정태춘이 나왔을 때 사오십대는 작은 탄성을 냈고 이십대는 물었다. “정태춘이 누구에요?” “음유시인인데, 우리나라의 밥 딜런 같은 존재랄까?” 난 가사도 음색도 최고인 가수라고 한껏 들떠 소개했다. 설명을 듣던 친구는 검색 본능에 따라 스마트폰을 켜더니 날 보여준다. 실시간 검색어 1위 정태춘. 집회에 온 젊은이들이 ‘늙은 가수’를 모르는 것이다. 지난 주말 집회에는 남성 댄스그룹 DJ DOC가 문화공연에 출연할 예정이다가 무산되는 일이 있었다. 현 국정농단 사태를 비판하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을 ‘미스 박’으로 칭하는 대목 등이 문제가 돼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
딸들은 두 번 절망한다 딸아이가 기르던 머리를 단발로 잘랐는데 친구들이 예쁘다고 했다며 하는 말. “엄마, 나 평생 이 머리만 할래. 박근혜처럼.” 이것은 엄마의 화를 돋우려는 중2의 반항인가. 하필 그분을 따라하느냐 물었더니 박근혜가 평생 한 가지 머리만 했잖아 한다. 그런데 왜 딸아이에게 대통령이 반면교사든 교사든 인생의 중요한 지혜를 알려주는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고, 헤어·패션·코스메틱의 교본을 제공하는 사람으로 각인됐을까. 삼십대 후반인 비혼 친구는 수난을 당했다. 엄마가 제발 결혼하라 다그치며 한마디 했단다. “너 그러다가 박근혜처럼 될래!” 엄마는 설상가상 내가 널 박근혜처럼 외롭게 한 거냐고 자책했다고 한다. 완고한 스타일, 드라마 덕후, 미용 시술 애호가, 부모 여읜 불쌍한 딸, 남편도 자식도 없는 외로운 여자 ..
죽여주는 여자 - 한 병 딸까요? 배우 윤여정이 ‘박카스 아줌마’로 나온다기에 영화 를 챙겨보았다. 윤여정이 맡은 배역은 소영.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삼팔3.8따라지’(전쟁 고아)로 태어나 식모살이, 공순이, 양공주 등 여러 직업을 거친다. 젊었을 때 미군 흑인 병사와 살림을 차렸고 아이를 낳았지만 키울 여건이 안 돼 해외로 입양 보낸 사연이 있다. 하필 전쟁통에 삶에 제약이 많은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필두로, 살면서 몇차례 난폭한 우연을 통과하자 남은 거라곤 몸뚱이 뿐. 65세 여성 노동자는 가방에 박카스를 챙겨넣고 파고다 공원 일대에서 남성 노인들에게 다가가 안색을 살피며 슬쩍 운을 뗀다. “한 병 딸까요?” 날 밝으면 가방 챙겨 출근하고 ‘한 건’ 하면 먹을거리 사들고 너털걸음으로 귀가하는 소영.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노..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나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중3 초에 그 학교를 알게 됐고 '공부 잘해야 가는 학교' '취업 명문'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가까스로 합격했고, 잠실에서 무악재까지 왕복 서너 시간 등하굣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다. 난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일찌감치 따두었고 2학년 올라가서 5월에 국내 최대의 증권회사로 취업이 결정됐다. 그때부터 책 보고 시 베껴 쓰고 음악 듣고 학교 건물 뒤편 우애동산에서 낙엽 주우면서 한량처럼 놀았다. 금융권에서 여직원은 여상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여상 중에서도 서울여상 출신인 나는 어딜 가나 대접받고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기죽을 일이 없었다. 고졸의 불편을 느낀 건 결혼할 때였다. 시가에서 노골적으로 내 학력을 문제 삼았다. 2세를 생각하면..
말하는 누드모델 ‘나는 해부학적으로 그려져 걸릴 것이다/ 훌륭한 박물관에. 부르주아들이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겠지/ 이런 강변의 매춘부 이미지에 대고. 그들은 그걸 예술이라 하지.’ 영국 시인 캐럴 앤 더피의 일부다. 시의 화자는 누드모델. 자신에게서 ‘색을 뽑’고 움직임을 통제하며 권력 감정을 느끼는 화가를 ‘조그마한 남자’(little man)로 부르고, 누드화에 감탄하는 영국 여왕을 ‘웃긴다’고 말한다. 이 시에서 여성은 그려지고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다. 자신을 보는 화가-관객을 보는 시선의 전도로 인해 역사상 목소리를 가진 적 없는 누드모델이 견자(見者)로 등장한다. 친구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이탈리아에서 미술관엘 갔는데 길게 늘어선 줄이 거의 여성이더란다. 전시실엔 백인 남성 화가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