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오르는말들

다 키웠다는 말, 잘 키웠다는 말

현관에 나가서 신발을 세어보았다. 커다랗고 시커먼 항공모함 같은 남자운동화가 네 켤레. 간밤에 놀러온 아들 친구들이 몽땅 방에서 자고 있는 모양이다. 새벽 6시. 아들 방문 밖에서 코고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내가 한 시쯤 잠들 때만 해도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몇 시에나 자는지, 이불은 안 부족한지 모르겠는데, 다 큰 사내녀석들이 자는 방이라 문도 못 열어보겠다. 벌써 3개월 째다. 11월 초 수능이 끝나고 거의 매일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기 바쁘다. 부산으로 강화도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오고 이 친구네로 저 친구네로 다니면서 숙박도 하고 집에 데려와서 자기도 한다. 지 다니던 수학학원에서 채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돈으로 자주색 바지도 사입고 피아노학원을 다닌다. 18년 인생의 휴가라도 얻은 듯 원없다.

어제 아들이 졸업식을 했다. 허둥지둥 살다보니 아들 졸업식도 이틀 전에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라는 공간은 왜 그리도 추운지. 체육관에서 두어시간 졸업식을 보고 교실에서 졸업장 수여식과 사진찍기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집에 와서 그대로 몸져 누웠다. 아들 졸업식인데 교실을 돌아서 나오려니 내가 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끌어잡는 게 무엇이더냐. 여러 장면들. 열여덟살적 나인가. 만남과 이별의 쓸쓸함인가. 시간의 속절없음에 대한 무기력인가. 40명 아이들 중에 문간에 앉은 한 아이만 책상에 꽃다발이 없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지 아프신지 장사를 하시는지. 부스스하게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앉아있던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저 아이들은 정말 다 큰 걸까. 아이가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 남학교를 처음 가봐서 그런지 어딘가 휑하고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는데 여기서 3년을 용케도 살았다. 아이가 3월 생인데 학교를 일곱살에 보냈다. 조기입학했으니 규정대로 다녔으면 지금 고2다. 며칠 전 거울 앞에서 연신 머리를 매만지고 한껏 뽐내고 놀러나길래 "니 동갑 애들은 지금쯤 추리닝 바람에 수학문제 파고 있을 텐데 일찍 마치니 좋으니?" 했더니 "나도 12년 동안 학교 다녔어요." 한다. 그래 네가 용타, 했다.

인생의 파란만장 곡절이 심했던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보낸 아들. 수레처럼 미주알고주알 겉으로티는 안 내도 지딴에 애로가 컸겠지. 그럴 것이다. 나는 아이졸업식에서 고3담임 얼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정도로, 방목형 육아를 내세우며 방임했고, 어느 날 보니 아이가 어른 됐다. 중고생 내내 필요한 학원도 자기 혼자 알아봐서 다녔다. 2학기에 아이가 반장을 했는데도 찾아가뵙지도 못했다. 선생님께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쭈뼛쭈뼛 인사 드렸더니 "반듯하게 잘 키우셨습니다" 했다. 헤어지는 마당에 덕담을 건네는 것이겠지만, 내가 반듯하게 키운 게 아니라 자체 발육했다. 여기 이 아이들, 입시지옥의 현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 견뎌내고 졸업식장에서 있는 것만으로도 자기인내 측면에서 반듯하게 컸다 할 수 있다. 대견하고 장하다. 다 컸으면 잘 큰 거다.

이달 하순이면 알게 된다. 대학은 어디로 가게될지. 일단은 한 곳이 합격되어 어제 등록을 마쳤다. 추가합격인가, 두 군데 대기번호를 받아놓고 있다. 끝까지 복잡하다. 입학처 화면에 등록버튼 옆에 환불버튼도 있고, 입학시스템이 너무나도 체계적으로 시장원리에 따라 거래되게끔 갖춰져 있어서 놀랬다. 기업화된 대학시스템에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대학을 거부하는 선언에 환호하면서도  대학의 죽음을 설파하는 글을 형형색색 밑줄 긋고 읽었으면서도 아이가 어디 한 군데라도 대학에 다리를 걸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한 나는 속인 부모일 게다. 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삶. 정신분열이 사람을 지적으로 만들어준다는데, 그런가. 중심 잡으려 몰락이 두려워 '삶의 균형' 잡으려 정신 바짝 차리고는 있다.

아이가 어떤 일을 하며 살든 부디, 자유인으로 살면 좋겠다. "정치가든 사업가든 공무원이든, 학자든, 하루 가운데 3분의 2를 자기시간으로 갖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라는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한국사회의 척박한 노동환경에서 불가능한 삶의 조건인데,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몸부림으로 살아가길. 

 

 

 

 

'차오르는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양이 장례식  (0) 2014.10.16
축제전야  (4) 2014.09.13
수레의 좁은 문  (13) 2013.08.16
밥, 채식으로의 이행  (8) 2013.07.08
돌아나오다  (4) 2013.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