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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수레의 좁은 문

엄마, 등싹이가 죽은 지 얼마나 됐지? 일 년 됐나 이 년 됐나? 수레가 등 뒤에서 묻는다. 날이 더워 의욕이 없는지 아침밥 먹고 내 누워 뒹굴뒹굴 거리더니 등싹이 생각이 난 모양이다. 엄마, 우리 그 때 백팔배도 했지. 근데 등싹이가 먼저 죽었나, 흥싹이가 먼저 죽었나. 나의 대답을 듣기 보다는 혼자 말을 던져놓고 여러 가지 기억의 조각을 맞추는 듯 보였다. 등싹이 외 세 마리의 구피가 순차적으로 운명을 달리하고 놀이터에 묻고 나서, 수레는 한동안 비만 오면 걱정을 했다. “등싹이, 납싹이, 흥싹이 떠내려가겠다.”

 

<올드걸의 시집>을 내고 개인적인 피드백을 받았을 때, 꽃수레 이야기에 대한 호응과 관심이 가장 컸다. 꽃수레 예쁘다, 얼마나 컸느냐, 꽃수레 보고 싶다.

 

 

아이들은 자란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수레도 많이 컸다. ‘어느 새 5학년올해 초, 수레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적혀 있던 말이다. 그것은 엄정한 사실인데 어쩐지 회한이 서린 듯한 말투에 웃음이 났다. 그 작던 아이가 어느 새 열두 살이 되었으니 양보 없는 학년이다. 나도 믿기지 않는 만큼 지도 그런 모양이다. 5학년이 된 수레는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을 하는가 하면, 신체검사를 앞두고 몸무게가 많이 나갈까봐 체중계를 연신 오르락내리락 거리면서 몸매 관리에도 힘쓴다. 봄부터는 납싹이들 키우는 것을 소홀히 하면서 동네 길냥이들 신상명세를 줄줄이 파악하고 사진을 찍어 와서 설명해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말했다. “~ 납싹이의 천적과 교분을 쌓다니, 너무 한 거 아냐?”

 

수레는 욕망이 크다. 나중에 부자로 살고 싶다고 한다. 어릴 때 살던 집이 친구들의 주거환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좁고 열악하다는 것을 체감한 뒤부터 귀족 같은 삶에 더욱 집착한다. 무엇보다 우리 집에서 모둠활동을 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컸다. 비록 월세지만 평수를 넓혀 이사 온 뒤로 두 가지를 기뻐했다. 자기만의 방이 생긴 것, 모둠활동이 가능한 너른 거실을 확보한 것. 그런데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엇갈림인가. 어느 새 5학년이 되고나니 모둠활동이 저학년 때만큼 활발하지 않은 거다.며칠 전에는 기도하듯 말한다. “, 제발, 2학기에는 모둠활동 과제가 있어야하는데!” 수레는 귀족처럼 사는 것보다 그런 삶을 인정해줄 타자가 필요해보였다  (수레가 4학년 때 지은 자작시 - 꽃수레)  

 

 

 

수레는 서당개 3년이다. 내가 기쁜지, 슬픈지, 근심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유아시기부터 거의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엄마의 감정의 기상상태에 연동하는 딸이다. 수레는 또 우리 집에 놀러오는 나의 벗들과도 연락처를 나누고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나누는 모양이다. 어느 날 친구가 귀띔했다. “수레 카카오톡 프로필 말머리 봤어?” 궁금해서 열어봤더니 떡 하니 이렇게 적혀 있다. ‘불취불귀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불취불귀. 이것은 허수경의 시 제목이고 당시 나의 프로필 글귀였다. 수레에게 물었다. “불취불귀가 무슨 뜻인 줄 알아?” “몰라!” 그런데 왜 써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엄마 카톡을 보았는데 그냥 좋아보여서 썼단다. 아이에게도 회한과 영탄조의 작부감수성이 어렴풋이나마 전해졌을까. 언어의 아우라에 매혹될 줄 아는 아이. 그것을 자기 언어로 취할 줄 아는 무모함이 대견해보였다.

 

내 아이가 감수성 영재로 자라려는가, 과대망상에 빠지려는 즈음 수레가 자기 방에서 터덜터덜 몸을 늘어뜨리며 나온다. “엄마, 이 책 독서기록문 숙제해야하는데 너무 어려워” “무슨 책인데?” “쫍은 문초등학생 논술용 앙드레지드의 <좁은 문>이다. 수레는 좁은 문을 계속 쫍은 문이라고 발음했다. 수레 생각에는 몸을 비스듬히 세워야 통과할 수 있는 옹색하고 비좁은 물리적인 도어를 연상하는 거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문짝은 안 나오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는 수레에게 이건 쫍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좁은 문이라고 설명했다.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나는 말했다. “수레가 읽기에는 너무 '쫍은 문'이니까 나중에 읽으렴.” 며칠 후, 수레는 집을 나서며 말했다. “엄마, 수레, 도서관에 쫍은 문반납하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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