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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밥, 채식으로의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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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지는 이삼년 됐고 실행에 옮긴 지는 이삼주 됐다. 불판에서 뜨겁게 지글거리던 돈육,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육식은 끝이 났다. 40년 넘게 이어온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생이 너무 무겁던 차다. 육신의 무게감. 최근 몸무게가 2키로 그람 정도 늘었는데 청바지가 꽉 끼어 불편했다. 의지의 둔중함. 뭐가 의적으로 수행되는 일은 없고 작업은 해도해도 쌓이니 답답했다. 왜 내 인생인데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는가 하는 불만이 목끝까지 차오르던 차에 채식으로의 이행은, 단기간에 나의 변화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채식을 통해 나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기분을 누리게 해주었으니 매우 유효한 선택이라 하겠다. 

소돼지닭. 네발두발 짐승을 안 먹고 있다. 우선은 어식은 한다. 며칠 전 이자카야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생이 무겁다면서 고기 안 먹고 기름 범벅인 '고로케' 튀김을 먹느냐? 생이 가벼워지는 데는 담백한 보쌈이 더 낫지 않느냐? 는 핀잔을 들었다. 고로케나 삼겹살이나 내 몸의 지방 섭취는 마찬가지일지 모르나 육식을 줄이면 지구생명에는 확실히 이롭다고 말해주었다. 취재 갔다가 인터뷰이랑 밥을 먹었다. 그분도 3년전부터 채식을 한다고 했다. 내가 초보 채식주의자라고 했더니 팁을 주셨다. "길냥이를 키우세요." 그분에 따르면 채식을 하면 고기 회식 자리를 기피하게 되는데 자기 몫으로 주어진 고기를 길냥이 갖다주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 목적의식적으로 기꺼이 참가할 수 있다고 했다. 한 수 배웠다. 혹여 고기 먹는 자리가 생기면, 이사온 뒤로 꽃수레가 교분을 쌓고 있는 울 동네 길냥이 '장군이'를 갖다 줘야겠다. 한 평생 일구월심 육식의 쾌락을 즐겨서인지, 아직까지는 고기 안 먹는 게 힘들지도 아쉽지도 않다. 마치 채식강조기간 캠페인처럼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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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는 날. 우연히 남편이 미울 때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남편이 밥 먹는 게 왜 이렇게 미운지 몰라요." "맞아요. 자는 것도 TV보는 것도 그냥 그런데 밥 먹을 땐 유난히 미워" "어머, 나도 그런데. 내 친구는 남편 밥 먹을 때 한대 치고 싶을 때도 있었대. 으하하하." 결혼연식이 오래될수록 다소 발언 수위가 과격해지긴 했지만 우리는 '아침마당'에 출연한 전원주 씨처럼 서로 쳐다보고 깔깔거렸다. 나도 동의했다. 나는 남편이랑 감정이 안 좋을 때는 '밥'앞에서 두번 좌절한다. 하나는,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저 사람은 개의치 않고 밥을 잘도 먹는구나 싶으면 진짜 얄밉다. 또 하나는, 한 인간의 기초적인 생명 활동에 대해 적의를 갖는 내 인격이 싫다. 나는 이거 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싶은 거다. 아무튼 다음 시간까지 연구해보자고 했다. 왜 남편의 밥 먹는 모습은 미운지.

어쩌면 밥 짓는 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밥에 대한 양가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돌아올 끼니 앞에서 무효가 된다고 김훈이 그랬다던데, 가스불 앞에서 땀을 흘리고 있으면 가사노동에 몸이 녹아버린다. 더 괴로운 것은 사는 동안 이 짓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물 앞에 있다고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샤워를 하면서도 변기를 닦고 하수구에 머리카락을 뽑아내야하니 도로 땀이 흐른다. 가끔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이 차려져 있고, 샤워하면 물 콸콸 내려가게 하수도에 머리카락도 빠져 있고, 변기에 오줌 방울 뿌려놓아도 깨끗이 닦여 있고, 양말과 속옷과 겉옷이 세탁해서 서랍에 넣어져 있고, 냉장고에는 항상 먹을 것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으면, 그런 세팅된 삶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기분이 들까? 나도 결혼 전에는 그렇게 살았을 텐데 고마움도 몰랐고 당연히 기억도 안 난다. 부끄럽다.

인류의 근본적인 분열은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나누겠다고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는데, 가족 안에서도 나는 하루에 몇번씩 인류의 근본적인 분열 양상을 경험한다. 아무리 몸이 축나고 마음이 들볶여도, 그리 살다보니 고통에 대한 민감성은 높아졌고, 그김에 채식이라도 결심했으니 그런 나를 기특하다 다독이면서 또 하루를 살아가야지. 하지만 채식주의를 윤리의 문제로 환원해서 섣부르게 판단하고 규정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 사회에는 채식을 선택할 여유와 자유가 없는 이들도 존재하니까.   

 

<육식의 성정치>에서 캐롤 아담스 같은 여성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 성적 소수자와 더불어 고통 받는 모든 존재들과 연대하는 정치적 실천으로서 육식을 거부한다...그런데 동물의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 인한 육식거부가 여성적인 '배려와 보살핌'의 윤리와 곧장 연결될 수 있는가? 야채를 먹을 수 없는 형편의 사람도 있다. 야채가 비싸기 때문에 정크 푸드와 싸구려 육류에 의존하는 빈민도 있다. 요즘 친환경 유기농 야채를 먹는다는 것은 라이프스타일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계층의 문제이다. 이렇게 되면 빈곤층은 고기를 먹는 카니발이고, 게으르며 자기 관리를 하지 앟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자들이 되어버린다. -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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