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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희망 / 유하



풍뎅이가 방충망을 온몸으로 들이받으며
징허게 징징거린다  

(난 그의 집착이 부담스럽다)

나도 그대 눈빛의 방충망에 마음을 부딪치며
그렇게 징징거린 적이 있다

이 형광등 불빛의 눈부심은
어둠 속 풍뎅이를 살게 하는 희망? 

(글세, 희망이란 말에 대하여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그가 속삭인다) 

그 무엇보다도,
징징대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풍뎅이는 벌써 풍뎅이의 삶을 버렸으리


- 유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아들이 졸업했다. 졸업식 전날, 아들의 등짝을 두드리며 치하했다. “욕봤다. 중학교 3년을 무탈하게 마쳐 다행이구나.” “앞으로 3년 동안 더 힘들 텐데요.” “아들, 공부가 고생스럽지?” “뭐...” “주변에 이십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라. 엄마가 차려주는 밥 먹고 정해진 과목 공부할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편했다고. 어른이 되면 먹고 사는 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기 선택, 자기 책임이야. 자유가 얼마나 피곤한 건데. 그래서 사람들은 명령에 따르고 무리에 끼고싶어하지.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도 있어.” 아들 귀에는 여름철 매미울음만큼 뭉개진 소음일 말의 덩어리를 뱉는다. 방충망을 온몸으로 들이받는 짓을 하던 나는 만감의 교차를 어찌하지 못하고는 혼잣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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