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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달빛길어올리기. 인사동 어디쯤에 자리한 민속주점이 떠오른다만 영화제목이다. 박중훈 강수연 예지원 장항선 등이 나온다. 전주에서 찍었다. 한지에 관한 영화다. 우리 것(알리기)에 천착해온 임권택 감독. 역시나 스크린에 펼쳐지는 풍광부터 절경이다. 달빛과 폭포와 바다는 비단실로 수놓은 듯 찬란하다. 날렵한 처마선이 춤추는 한옥마을, 한지공예는 예술이고. 지천년, 견오백. 종이는 천년, 비단은 오백년을 간단다. 천년 가는 종이를 만드는 장인이 나온다. 한지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었다. 나의 무지와 우리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래서 별로였다. 교훈이 과했다. 영화라기보다 전주시에서 제작한 한지홍보다큐멘터리를 본 듯한 기분이 든다. 노트필기 했으면 공책 몇 장은 나왔을 거 같다.

거장감독 작품이라 더욱 아쉽다. 임권택 감독이 백한 번 째 영화라고 한다.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혼자서 쓰는 소설을 백편 쓰기도 어려운데, 영화는 공동창작이다. 어떻게 백 편을 찍으셨을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분이다. 사실 난 서편제를 못 봤다. 안 봤나. 암튼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던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임권택 감독이 조급하셨나. 세월은 화살처럼 흐르고, 몸은 기울어가고, 세상에 전할 이야기는 많으니 바쁘셨을지 모르겠다. 자연스레 단추보다 지퍼를 택하게 되는 걸까. 단추보다는 더 많이 넣을 수 있고 서둘러 당도하는 지퍼. 요즘은 세상 사람들을 관찰하며 내가 나이 들면 어떤 모습일지, 그런 생각을 자주한다. 조심스럽다. 지퍼로 봉합하기보다 금단추 은단추 꽃단추 끼우며 세상의 벌어진 틈을 메우며 살아야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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