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요’ 며칠 전 아는 동생이 댓글로 달았다. 표현이 적절하고 절실해서 뭉클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나야 말로 산다는 것이 뭘까, 인생은 왜 이리 긴가, 상념이 많은 요즘이다. 아이들 밥 세끼 거둬 먹이다보면 어느 새 부엌 창문으로 어둠이 깔린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한 하루살이. 앞으로도 큰 틀에서 달력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일상은 이리도 단조로운데 인생은 왜 이리 험난한가. 아이러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어릴 때 학교 다니고 어른 되어 일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식 키우다가 병들어 죽는 인간의 일생. 이대로 살기도 벅차다. 고난도 기술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게 쩔쩔매면서 내 한몸 챙기고 내 새끼들만 거두다가 저무는 게 삶이라면 허무하다. 인간이 단체로 약속한 듯 그런 생을 살아가는 세상이 시시하다.
내가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이 새털 같은 날들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평생 해도 지겹지 않은 일이 뭘까. 권불십년. 십년 가는 권력 없다지만, 십년 가는 열정도 없어 뵌다. 십년 지나면 심드렁하다. 그래서 인류는 자식을 지속적으로 낳는 게 아닐까. 곡식이나 동물을 키울 수 있지만 사람 키우는 일이 가장 오래 걸리고 덜 반복적이다. 매일매일을 바치는 성실함이 필요하다. 밑 빠진 독에 열심히 물 붓기 같은 미련함. 그렇게 해서 예술가가 작품을 남기는 대신에 민초들은 자식을 남긴다.
이런 생각도 든다. 인간은 태어날 때 일정량의 사랑을 갖고 태어난다. 그걸 어느 대상에 쏟아 부어야 한다. 다 퍼줘도 아깝지 않은 대상으로 자식을 낙점한다. 자식한테 정 주고 돈 주면서 아깝지 않다고 여긴다. 그것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착각이고 환영이다. 자식이 아니라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영혼과 육체가 마모되는 임노동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본의 아니게 파업과 태업이 속출할 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가족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를 지탱한다는 맑스의 지적에 동의한다.
* 명절을 생각한다
이 막연한 자본제적 삶에 대한 불만이 '명절'에 증폭된다. 가족주의의 불합리와 누추함을 명절에 극명히 느낀다. 명절 후 이혼이 급증하는 기사가 이를 뒷받침 한다. 부모형제자매의 다툼과 절연도 명절에 성사되더라. 나 역시 명절과 명절 사이 쑥쑥 크는 조카들을 보면서, 푹푹 꺼져가는 어르신들의 주름을 보면서, 돈자랑 자식자랑의 말잔치를 경청하면서, 연극처럼 상연되는 인간의 삶이 하찮게 느껴진다. 누구 좋은 대학 갔다. 주식 투자해서 얼마 벌었다. 그 아파트로 갈아 탔어야했다. 어느 연예인은 돈을 쓸어 모았다. 가족들 위해 밥 하는 게 여자의 행복이다. 뉘집 딸 변호사랑 결혼했다 등등...
밥상 앞에서 여자의 노동을 과식하고 TV 앞에서 값싼 웃음을 소비하고 자식 앞에서 물적 가치를 설파한다. 그것을 온 일가친척이 모여서 행하고 다지는 자리가 명절이다. 마을단위 공동체가 살아 있을 때 명절은 놀이고 축제이고 나눔과 화합의 장이였으나, 공동체가 붕괴된 오늘날, 명절은 고역이고 노동이고 허식과 불화의 장이다.
괜히 음식점 문까지 닫아서 더 쓸쓸하다. 이번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후배가 맘에 걸려서 전화 한통 넣어보았다. 관짝 같은 좁다란 방에서 무릎 세우고 음악 듣고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햄버거 하나 먹었어요, 한다. 존재고민에 끼어든다. 삶의 배치를 바꾸면 늘어지는 일상에 탄력이 생길 수도 있다. 부모님 의견이 꼭 다 틀린 건 아니다. 새겨들을 부분은 수용해라. 하기 싫은 일을 하다보면 하고 싶은 일을 만날 수도 있다. 인생 꽤 길다. 어떤 큰 한 번의 중대 결정으로 인생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근원적 욕망과 소소한 선택이 삶을 이끈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추구와 지향대로 살아가더라. 그러니 온 존재를 걸고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말면 좋겠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구구하게 떠들었다. 서울4년제 대학, 국내30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배우자 찾은 자식들만 어깨 펴고 고향부모 찾는 명절에 반대한다. 2대8의 사회에서 명절에 웃는 자는 2뿐이다. 8의 존재는 눈물 흘린다. 명절 아니라 암절이다. 명절에 어른아이 다 모여서 살아온 지혜와 음식을 두런두런 나누는 모습은 기대할 수 없는가. 살기 힘들어진다는 이유로 가족내에서도 강자를 선망하고 인정한다. 약자를 배려하고 감싸안는 감수성은 메말라 간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이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각박한 세상의 아픔을 경각시키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