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남편이랑 싸웠다. 오랜만의 심각한 다툼이다. 무릇 부부싸움이 그렇듯이 사소한 안건이 싸우는 동안 인격 자체를 문제 삼는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남편의 감정 그래프는 원래가 잔잔한 해수면이고 나는 파도치는 유형이다. 그래서 싸움의 러닝타임은 길게 가지 않는다. 내가 폭풍 분노를 퍼부으며 눈물을 찍어내다 보면 남편은 쿨쿨 자고 있다. 허탈하다. 나 홀로 분노의 뒤안길 어슬렁거린다. 하나둘 케케묵은 원한감정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마치 버스가 흙탕물 튀기고 지나간 것처럼, 순식간에 기억의 오물을 뒤집어쓰고서 나는 맹렬히 후회한다. ‘그 때 결판을 내렸어야 하는데......’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서’ 마루에다 이불을 폈다. 평소에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야 잠이 잘 온다며 아빠 곁을 사수하던 꽃수레를 꼬드겨서 오늘은 엄마 옆에서 자자고 했다. 이불위에 나란히 누웠다. 불을 껐다.
“수레야. 넌 아빠가 왜 좋니?”
“성진이(아빠)는 내 친구잖아.”
(지난여름 연대캠퍼스에서 아빠랑 산책하며)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봐도 꽃수레는 남편이랑 단짝친구다. 저녁에 내가 집을 비울 때 둘이서 시간을 보내면서 친해진 모양이다. 아빠가 동화책 읽어주고 수학 가르치고 이런 건 전혀 없다. 늙은 부부처럼 TV 앞에 딱 붙어 앉아 주로 드라마를 보면서 희로애락을 나눈다.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금요일은 쉬고 주말드라마를 본다. 남편이 저녁약속 때문에 드라마를 못 보면 다음 날 꽃수레한테 진지하게 물어본다. “서형아, 어제 그거 어떻게 됐어?” 그럼 꽃수레는 드라마평론가처럼 신나서 떠든다. 꽃수레에게 아빠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요청하든 즉각 대령하는 ‘다이소’이자 어떤 감성의 격차도 느낄 수 없는 ‘눈높이 친구’이고 드라마 환담이 가능한 ‘말벗’인 것이다.
지난 수년간 남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빛바랜 사진이었다. 그 옛날 내가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란 게 참으로 어색했다. 사랑은 뭉개지고 미움과 원망마저 희미해진 무색무취의 감정으로 일상의 공조관계를 이루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꽃수레와 알콩달콩 지내는 남편에게서 옛날 모습이 언뜻언뜻 비췄다. 내가 남편을 좋아했던 이유들, 착한 눈빛과 심성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변화였다. 주변에서 선배랑 친구가 남편을 착하다거나 그래도 낫다거나 그런 사람 없다고 말하면 심드렁했는데 꽃수레가 “아빠는 온순하다”고 말하면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빠랑 넓은 거실 예쁜 쇼파에서 벽걸이TV보는 꿈을 꾸는 꽃수레)
사랑의 징검다리- 꽃수레 덕분에 모처럼 순풍기류가 흐르던 중 부부싸움을 하니까 더욱 더 속상했다. 아무튼 싸운 다음 날, 밤새 뒤척였더니 피곤하고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꽃수레는 그날도 아빠 타령이다. 내 핸드폰을 가져가서는 오늘 몇 시에 올 거냐고 아빠한테 문자를 보내겠단다. 난 말했다. “끝에다가 꽃수레라고 꼭 써라!” “왜?” “엄마가 보낸 줄 알잖아” 냉랭한 나의 말투에 눈치를 살피며 보내더니 낮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니까 ‘아빠 여기 눈 많이 내려. 강남도 눈 많이 와?’ 문자를 띄운다. ‘응. 여기도 많이 와.’ 즉시 답이 왔다.
딸내미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불편한 감정을 자제하느라 답답했다. 오후 무렵 꽃수레가 옆집에 놀러간 틈에 친구한테 전화해서 남편 흉을 한바탕 보고는 ‘확 이혼해 버릴까봐’ 하소연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밤이 되었다. 꽃수레가 오늘은 아빠도 마루에 끼워주고 셋이서 자자, 아빠 혼자 방에서 자면 불쌍하다며 일장 연설이다. 나름대로 아빠의 권익보호와 입지확보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저것이 아이가 맞나 싶게 속이 깊고 인정이 많은 모습을 보여서 짠했는데, 학원에서 돌아온 오빠가 마루에 펴놓은 이불 위에 눕자 순식간에 각자 서랍에서 팬티를 꺼내 수면모자처럼 쓰고 ‘팬티던지기’ 놀이를 시작한다. 팬티를 던지고 맞고 피하고 배를 움켜쥐고 웃고 뒹구느라 두 아이가 양쪽 뺨이 빨개졌다. 어이없고 유치찬란한 놀이를 지켜보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열 살답게 단순한 딸과 아직도 팬티와 방구에 열광하는 철없는 예비고1 아들을 보면서 우울함이 가셨다. 문득 내가 너무 비관적이고 심성이 삐뚤어진 것같아 부끄러웠다.
부부싸움 3일차. 이런 내 맘을 아는지, 꽃수레가 무슨 얘기 끝에 명언을 남겼다.
“엄마. 원래 사람은 아껴야 되는 거야. 더군다나 내 아빠인데 당연히 아껴야지...”
(꽃수레가 외우는 명언: 자식은 어려서 부모를 찾고, 부모는 늙어서 자식을 찾는다)
항복했다. 남편을 이해해주기로 결심했다. 만약 꽃수레가 아빠만 챙기는 ‘가족주의자’였으면 ‘아빠쏠림’ 현상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꽃수레는 우리 집 어항에서 20여 마리 물고기가 죽어가는 동안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명체, 올챙이보다도 더 작고 신생아 손톱보다 더 투명한 새끼물고기에게 정말 극진하다. ‘점싹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불러주고 날마다 밥을 챙겨주는 건 물론이고 수시로 들여다보며 안위를 염려하고 예쁜 인형이 생기면 그 앞에다가 놓아둔다. 외로울 테니 쳐다보면서 놀라는 배려이다. 또 그림을 그리면 가장 먼저 갖다 보여주면서 말을 시킨다. “점싹아, 내가 그린 그림이야. 잘 그렸지?” 하고는 동시통역한다. “엄마 점싹이가 나 그림 잘 그렸대. 내가 물어보니까 꼬리를 두 번 흔들었어!” (-.-;;)
나한텐 두통거리 남편도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보듬어서 천사같은 친구로 삼고, 내 눈엔 잘 뵈지도 않은 실오라기 같은 미물인 물고기도 말벗으로 대해서 교감하는 아이. 꽃수레를 통해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확인한다. 원래부터 정해진 선험적인 본성은 없다는 것. 다른 관계와 작용 방식에 놓임에 따라 존재의 본질이 결정된다는 우주의 섭리를 말이다. 겨울방학이라 하루 종일 옆에 붙어서 고장난 라디오처럼 떠들어대는 바람에 글 한줄 못 쓰고 책 한 줄 못 읽지만, 인생과 인간의 문제에 능통한 철학자가 아닌 말랑말랑한 아이에게서 삶의 기술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