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입학식 날. 애들 학교 보내고 오전 내내 잤다. 긴긴 겨울방학, 늦잠형 인간으로 길들여진 몸이 자동적으로다가 나를 침대로 이끌었다. “엄마는 입학식에 오는 거 아니다”라는 아들 말을 덜컥 수용하고 집에서 게으름을 피운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쉬고 싶다. 아들의 고등학교 진급에 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며칠 전에는 교복을 사러 갔더니 다 팔리고 없어서 다섯 군데나 되는 교복매장을 순회했다. 마지막 매장에서 엄청 큰 재킷 하나 겨우 확보해 동네 수선집에서 사이즈를 대폭 줄였다. 하마터면 교복도 못 입혀 학교에 보낼 뻔 했다. 설마 교복이 품절됐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졸지에 ‘게으른 엄마’ 됐고 매장마다 "왜 이제야 사러 나왔냐"고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교복 사는 것까지 속도경쟁을 해야 하나.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이 속도감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졸업식날 교실에서) 입학 전 배치고사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고등학교에서 우리 아이의 위치가 어느 정도가 될지 염려스러웠다. 고등학교는 수능체제이고 수능은 곧 인생등급표다. 막연하던 현실이 구체적으로 다가오자 무력감을 느꼈다. 도망갈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바보같은 처지라니.
그나마 울 아들 학교는 나은 거였다. 명문으로 소문난 옆 고등학교에서는 반 배치고사를 일주일 사이 무려 세 차례나 치렀다. 스카이의 꿈을 품고 목동에서 대치동으로 이사 가 강남의 명문고에 들어간 아들 친구는 배치고사를 2번 치르고 성적표도 두 번이나 받았다고 한다. 입학도 하기 전에 아들의 현 위치를 적나라하게 파악했다노라고 그 엄마가 하소연이다. 섬뜩했다. 각 고등학교마다 명문대 진학률 높이려 혈안이다. 엄마와 아이들을 쉼 없이 닦달한다. 마른 행주 짜듯이 짜고 또 짜면서 부모와 아이들 숨통을 조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다. 나는 얼마나 담대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사교육 폐지를 주장하는 남편과 다퉈가면서 당분간 수학은 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고등부가 되니 수업료가 올랐더라. 솔직히 돈이 아까웠다. 그래도 끊을 용기가 안 생겼다. “너 혼자만 잘 살라고 돈 들이고 밥 먹여서 공부시키는 거 아니다! 땀 흘리는 사람이 존경 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해” 괜히 아들에게 한마디 던지면서 소심한 선택에 물타기를 한다. 돈 있는 집 아이나 없는 집 아이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하는데 지금은 너무 불공평하다. 계급재생산의 메카가 되어버린 대학. 그것을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 풍토에 따르자니 화가 치민다.
지난주엔 아들을 서울대에 보낸 선배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나는 만약 아이가 대학을 안 가거나 지방대에 가도 괜찮다고 했다. 선배가 “왜 해보기도 전에 그런 생각을 하느냐” 몹시도 나무라며 열심히 시키라고 충고한다. 내가 볼 때 소위 운동권 출신 학부모가 더 학벌에 연연한다. 자기네가 풍요로운 인맥속에 살아서 그 달콤한 맛을 알아서 그럴 거다. 저항적 실천은 없고 이념만 드높은 강남좌파 선배들을 나는 존경할 수 없다. 그러면서 나도 그들과 크게 차이가 없는 상황이어서 쪽팔리다. 갈팡질팡. 사는 게 몹시도 헷갈린다. 이 미궁을 탈출하는 방법은 단 하나. 아들이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모드로 구원받아 EBS와 교과서만으로 우월한 성적을 내는 것이다. 신문에 나오는 애들처럼 그렇게 좀 해주면 좋으련만. 현재로선 그런 복은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이어폰 밀착형 인간) 아들이 얼마 전 고등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적성검사를 했는데 늘 그랬듯이 음악지능 점수가 가장 높게 나왔다. 인간친화지능이랑 논리수학지능이 그 다음으로 높고, 언어지능 운동지능 자기성찰지능이 낮다. 징그러울 정도로 남편과 유사한 캐릭터여서 흠칫했다. 아들이 그런다. “엄마! 성공하려면 자기성찰기능이 높아야 된대요.” 맞장구쳤다. “누가 아니래. 제발 생각 좀 하고 살라라! (이놈아) 정말이지 내 아들이 생각 없는 수컷 되는 꼴 나는 못 본다” 일침을 박았다. 부모로서 아이의 적성을 살려주고 싶다만 적성을 알아도 적성대로 키우기도 쉽지 않다. 음악지능과 폭풍친화력으로 먹고 사는 일을 따져보니 온통 밥 굶는 직업뿐이고;;
아들 입학식이 끝났다. 내일부터 정상등교다. 일단 주사위는 던져졌다. 날마다 주사위를 던져야 새로운 날이 열린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가보는 거다. 오후 무렵, 커피로 정신을 일깨우고는 답 없는 고민에 종지부를 찍고자 루쉰 책을 폈다. 은혜롭게도 나를 위한 글이 준비돼 있었다. 아리시마 다께로 저작집에서 읽은 좋은 글이라며 루쉰이 통째로 인용했다. 백년을 돌아 지금 이 순간, 내게로 왔다. 고등학생이 되는 아들에게 읽어주고픈 글. 제목 <아이들에게>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너희들의 아버지인 내가 후에 너희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 그것은 상상할 수 없다. 아마 내가 지금 여기서 사라져간 시대를 비웃고 연민하듯, 너희들도 나의 케케묵은 마음가짐을 비웃고 연민할지 모른다. 나는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너희들은 나를 발판으로 삼아 높고, 멀리 나를 뛰어 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몹시 쓸쓸하다. 우리들은 그저 이렇게 말만하며 태연히 있을 수 있을까? 너희들과 나는 피의 맛을 본 짐승처럼 사랑을 맛보았다. 가자, 그리고 우리들 주위의 쓸쓸함을 제거하기 위해 일하자.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다. 영원히 사랑한다. 이것은 어버이로서 너희들에게 보답을 받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나의 감사를 받아달라는 것 뿐.
죽어 넘어진 어미를 먹어치우면서 힘을 기르는 사자 새끼처럼 힘차고 용감하게, 나를 떨쳐버리고 인생의 길로 나아가거라.
내 일생이 아무리 실패작이더라도, 내가 아무리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의 발자취에 불순한 어떤 것을 너희들이 발견할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 꼭 그렇게 하겠다. 너희들은 내가 죽어 넘어진 곳에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를 너희들은 나의 발자취에서 어렴풋이나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아, 불행하지만 동시에 행복한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의 축복을 가슴에 간직하고 인생의 여정에 오르거라. 앞길은 멀다. 그리고 어둡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거라.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앞에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