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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추석전야, 화양연화




화양연화는 와인인가. 기후와 기분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음악이다. 가을, 이렇게 비라도 내리는 날에 화양연화의 감동은 최적화된다. 비내리는 추석. 내 마음은 양조위의 잘생긴 뒤통수와 하얀셔츠 위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따라 뭉개뭉개 떠다니는데, 곧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기름 뒤집어 쓰고 전을 부쳐야 한다. 익숙해진 자아분열. 딱히 기다릴 것도 그리울 것도 없는 명절. 뉴스에 나오는 귀경길 인파처럼 내 발걸음은 겅중겅중 기쁘지 아니하다. 가을에 날 설레게 하는 것은 추석이 아니다. 한가위 차오른 달처럼 시린 음악과 빼어난 미장센이 어우러진 영화, 화양연화다. 

어제 오후, 멸치선물세트 들고 아는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오픈 카페에서 맥주 한잔 마시는데 핸드폰이 띠리릭~ 양쪽에서 울려댄다. 명절이라고 풍성한 한가위되시라고 여기저기서 문자가 오는 거다. 죄다 무슨 정치인들/단체장들의 것이다. 선생님과 나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단체문자는 결코 기쁘지 아니하다고. 외려 내가 그 단체의 일원이라는 게 불쾌하다고. 보내는 사람은 그걸 모를까. 말해주고 싶다. 문자를 보내려면 누구야, 이름 부르고 얼굴 떠올려가면서 마음 담아 보내는 것이 예의같다. 정치하려면 사람 마음을 헤아려야하는데 정치인이 되면 하나같이 인간의 보편감성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새단장한 교보에 처음 가봤다. 아직 전체 구조가 눈에 안 들어오니까 번잡했다. 명절전야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그들도 나처럼 명절이 달갑지 않거나 마음 한구석 쓸쓸한 이들이겠지. 대략 한바퀴 돌아보고 위치를 익히고 음반매장에서 음악을 듣다가 어디 구석에 자리잡고 책을 보았다. 새집증후군인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낯섦이 가시려면 열번은 와서 어슬렁거려야할 것 같다. 심심해서 근처 사는 선배를 불러냈다. '우동먹자~' 30분 후에 선배가 와서 동경우동에서 뜨끈한 우동을 먹었다.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커피 들고 해치광장에 가려다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커피빈에 자리잡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다. 밤이 깊었다. 선배가 '치즈케잌'을 사줘서 손에 들고 지하철을 탔다. 

마을버스에서 라디오 사연이 나온다. '남편이 명절 때 고생하니까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해서 오늘 저녁을 근사한 데서 먹었어요.' 디제이가 그거참 좋은 방법이라고 호응한다. 여자들의 명절 전야, 그 다양한 풍경들. 나는 나를 위해 기꺼이 하루를 냈다. 내 좋은 사람과 낮술을 마시고, 커다란 책방엘 들르고, 뜨끈한 우동을 사먹고, 달달한 카메모카를 마시고, 촉촉한 치츠케잌을 먹고, 그리고 애절한 서정시 화양연화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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