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때 월악산 부근 휴양림을 산책했다. 다들 물놀이를 갔는지 통나무집도 비어있고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산으로 난 호젓한 숲길을 넷이서 흩어져 걸었다. 맨 앞에서 이꽃 저꽃 살펴보던 꽃수레. 강아지풀 서너 개 뜯어서 가지런히 세운 다음 뒤돌아 나를 부른다.
“엄마, 이거 '푸르지오' 상징이다! 그치?” “어머 그러네. 어떻게 알았어.”
참내, 이걸 눈썰미가 좋다고 칭찬해야하는지 애답지 않다고 꾸짖어야하는지 헷갈렸다. 온통 넓은 집, 쾌적한 주거공간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꽃수레는 삼성은 래미안, GS는 자이, 대우는 푸르지오, 현대는 힐스테이트 등 국내 유수의 아파트 브랜드를, 구구단보다 먼저 외웠던 참이다. 그 뿐 아니다. 아빠랑 둘이 부동산정보 웹서핑을 날마다 해대는 통에 집값이 싼 서울 변두리와 동백지구 동탄지구 등 신도시 시세 및 동향까지 섭렵했다. 성묘 가는 길, 고속도로에서 ‘죽전’ 휴게소 표지판을 보더니 꽃수레가 외친다.
“죽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다~”
"-.-"
부동산뱅크가 된 꽃수레
지난주 토요일엔 성남에 가느라 꽃수레 뒤에 태우고 올림픽대로를 달렸다. 9월 햇살이 좋았다. 일년 365일, 하루 중 어느 때고 한강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큰 강물. 내가 한강에 심취했을 때, 꽃수레는 뒤에서 여의도-반포-압구정동-청담동에 이르는 금싸라기 동네 아파트를 관찰했다. 여의도가 주상복합이 많다는 둥 떠들더니 내가 호응을 안 하니까 조용했다. 청담동 이를 즈음, 분당수서간 고속도로를 타려는데 뒤에서 꽃수레가 호들갑이다.
“엄마, 이 아파트 뭐야?” “어디? 응 그거. 이름을 모르겠네. 암튼 엄청 고급 아파트야. 왜?” “건물이 너~무 예쁘다.” “멋지지? 전망 좋고 내부도 넓어. 엄마가 알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가의 아파트래.” “아~ 수레, 여기서 살고 싶다.” “얼마나 비싸다구~” “그럼 안 되겠다. 꽃수레가 저 아파트 삼킬래. 아흡~”
어찌나 탐욕스럽게 아그적 쩝쩝 소리를 내는지 아파트가 참크래커처럼 한입에 들어가 부서져버리는 것 같았다.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엄마, 수레, 저 IBK기업은행도 먹을래” 한다. 점입가경이다. “꽃수레 왜 그렇게 탐욕스럽게 굴어? 은행 먹어서 뭐하게?” “은행에 돈 많잖아. 그 돈으로 큰 집에 이사 갈래.” “은행은 돈만 많은 곳이 아니라 빚도 많은 곳이야. 부실은행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너 자꾸 그러면 이제부터 꽃수레 아니고 돈수레할래? 빈수레로 왔다가 빈수레로 가는 게 인생이거늘..." (덕수궁 취재 갔다가 맘에 들어 찍은 사진ㅋ)
이건 뭐 꽃이 잔뜩 담긴 '꽃수레'가 아니라 아파트와 돈이 담긴 ‘부동산뱅크’로 개명해야할 판이었다. 나는 이날 이 때까지 인터넷으로 아파트 시세를 쳐본 적이 없건만 고작 아홉살짜리가 저러다니, 내 딸이 맞나 싶었다.
태풍 덕에 간단하게 집수리를 했다. 집주인이 베란다 샤시를 바꿔주고 조금씩 물이 새던 화장실을 싹 고쳐줬다. 거실의 도배와 바닥은 우리 돈 들여서 새로 했다. 그랬더니 집이 한결 환하고 쾌적해졌다. 꽃수레는 화장실이 호텔 같다며 이제 우리 집에 대만족이라고, 자기 대학생이 될 때까지는 여기서 계속 살자고 한다. 아빠랑 둘이 불철주야 모니터에 머리 들이밀고 해나가던 부동산 일일공부도 전격 중단했다. 난 딸내미가 최연소 공인중개사 시험이라도 합격할까 했는데 자못 섭섭했다.ㅋ
며칠 후, 꽃수레가 “일기 잘 써서 선생님한테 칭찬받았다”고 한다. 뭐에 대해 썼냐고 물었더니 보여주는데 제목이 ‘공사가 끝났어요^^’ 내용은 이렇다. '우리집은 지난주 7호 태풍 곤파스가 불어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우리 집도 25년이나 묵었다. 그래서 집이 무지 낡아보였다. (중략) 우리 집이 20평이어서 좁은 이유는 부엌과 거실 사이에 문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루 만에 뚝딱! 고쳤다. (중략) 우리 집이 정말로 자랑스럽다. 좁아도 뭘 해도 자랑스럽다. 왜냐하면 깨끗하고 넓어졌기 때문이다^.^'
낡고. 좁고. 지저분한. 2O평.이라고 굳이 쓸 것까지야 있나 싶어서 얼굴이 화끈 거렸다. 마지막에 자랑스러워 하는 대목에선 함박웃음 짓는 꽃수레의 상승기운에 나도 덩달아 기뻐졌다. 지 말대로 IBK 기업은행이랑 고가의 아파트라도 삼킨 듯 자부심 가득한 일기였다. 꽃수레는 요즘 행복지수가 높다. 항상 앞 집에 가서 놀더니만 이제 앞 집 동생도 집에 불러다 논다. 자랑스러워서 소개시켜주고 싶단다. 집그림 그리기에도 더욱 탄력이 붙었다.
의미와 무의미 왕복운동
집수리할 때, 남편이 식탁을 버리고 공간을 넓게 쓰자고 제안했다. 우리집 거실에는 지나치게 큰 식탁이 있다. 나는 좋아하는 디자인이라 안 된다고 고집했다. 그런 얘길 하면서 “책 볼 수 있는 일인용 소파 하나 놓고 싶긴 하다”고 푸념했다. 책상에서 책 보다가 어디 푹 몸을 담그고 싶을 때가 있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잠드니까 절충지대로 소파쿠션이 그리운 거다. 그런데 아무리 재어 봐도 공간이 확보되질 않아서 포기했다. 그 얘길 귀담아 들은 모양이다. 어제는 꽃수레가 그림을 건넨다. “엄마, 내가 건축공학과에 입학해서 건축가가 되면 엄마 방을 이렇게 꾸며줄게~”
늘 그리던 서재. 책상에 옆에 오른쪽으로 사장님용 일인용 소파가 반쯤 보였다. 우리 꽃수레 밖에 없다며 감격해서 감상하는데 책상 위에 책 제목이 눈에 띈다. <의미와 무의미> 메를로 퐁티 책이다. 세잔느에 관한 아름다운 글이 한편 있어서 얼마전에 샀는데 꽃수레가 그걸 눈여겨봤다가 쓴 거다. 그 즈음 구입한 책이 열권 남짓이다. 근데 왜 하필 저 제목에 관심이 갔을까. 꽃수레에게 물어봤더니 "그냥~" 이라며 베시시 웃는다.
“꽃수레, 근데 의미와 무의미가 무슨 뜻인지 알아?”
“의미가 있는 거랑 없는 거”
메를로 퐁티는 의미-표현(전달)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작품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고서는 결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창조자의 사고도 수용자의 사고도 작품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며 최고의 이성은 비이성과 근접해 있다고 말한다. 도덕의 원칙도 마찬가지라며 의미와 무의미 체험의 길항작용을 얘기한다. 아마 돈도 그렇지 않을까. 쓰임의 운동을 통해서만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매순간 정확하고 그 자체로 완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해결책도 주어지지 않는다.” 메를로 퐁티의 말.
저녁밥으로 비름나물, 깻잎나물, 고구마순나물로 산채비빔밥을 먹은 꽃수레가 그런다. "엄마. 수레는 나물이 질기고 맛 없는 줄 알았는데 너무 고소하고 보드랍고 맛있어서 자꾸 손이 가. 앞으로는 아이비케기업은행 안 먹고 나물만 먹을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나물 많이 먹으면 몸에도 좋아." "살도 안 쪄?" "그럼~" 나물의 의미를 알아가는 꽃수레. 돈의 의미와 무의미, 집의 의미와 무의미, 꿈의 의미와 무의미, 나물의 의미와 무의미....꽃수레는 의미와 무의미를 왕복운동 하면서 세상과 만나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