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내가 좋아하고 따르는 사부에게 전화가 왔다. 관에서 주최하는 어떤 프로젝트가 있는데 참여해보라고 했다. 내가 적임자 같다고. 난 재밌을 거 같아서 하기로 했다. 나름은 최선을 다했다. 기획안 내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갔다. 속으론 신경질 났다.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것도 그렇거니와, 왜 당연하게 마치 부하직원 다루듯이 이런저런 걸 요구하는지 내 상식으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소개해준 사부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나중에 한번 더 올 것을 요구했다. 갔다. 세 주최 측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말이 전부 달랐다. 중구난방 이거해달라 저거해달라 의견이 봇물터졌다. 방향성도 없는 상태에서 '당신이 알아서' 기획안을 최종적으로 오늘 밤까지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했다.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지만 완수했다. 다음 날 한 주최측에게 전화가 왔다. 처음의 약속이 달라졌다. 강력하게 항의했다. ‘규정’ ‘관행’ 운운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적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럼 난 이만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3자가 번갈아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원래대로 해준다며 달랜다. 같은 사안에 대해 각각 세차례씩 입장표명을 해야했다. 두통에 시달렸다. 메일을 보냈다. 나는 관료문화에 들어가면 시든다. 건강상의 문제로 함께 하지 못하겠다.
암튼 그 이후에도 난리였다. 프로젝트 딴 것이 무효가 되느니 마느니. 묘한 죄의식을 유발시키는 분위기로 몰고 갔다. 나는 안다.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조직에서 나사 공급이 늦어지는 일은 있어도 중단되는 일은 없다. 나도 미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인지상정’에 휘말려 상황만 얽혔으니 더 미궁으로 빠지기 전에 이제라도 흐름을 끊고 나와야했다. 이건 단순히 일의 양이 많아서 좀 더 고생하는 차원이 아니라 막강한 감정노동이 요청되는 일이다. 계속 그들관행의 범주에서 일하고 생산물을 번듯하게 내야했다. 은근한 노동 착취로밖에 볼 수 없는 이 상황에 울분이 치밀다보니 내 삶의 균형이 깨져버린 것이다.
고민의 도가니탕에 빠졌을 때 사부와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관료문화는 연탄가스야. 두통이 가시질 않네.’ 내 신체의 유난스러운 반응에 나도 놀랐다. 그분들이 개개인은 선한 분들이었고 무엇보다 내게 호의적이었다. 열정의 조화가 이뤄지지 않았고, 그걸 조율할 능력과 이유와 의미를 내가 찾지 못한 것이다. 아마 30대였으면 덤벼들어서 고난을 헤치고 멋지게 해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상황의 중력에 짓눌려 몸이 무너져버린다. 이런 나를 보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 두 가지를 알았다. 조직의 쓴맛, 후회의 눈물.
첫째 조직의 쓴맛. 내가 이리도 관료조직에 항체가 약한 이유는 ‘조직의 쓴맛’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 같다. 회사생활을 했지만 비교적 분위기가 개방적인 금융권이다. 돈이 움직이는 조직은 직급보다 능력에 따라 위계가 결정된다. 노조에서 일할 때도 능력껏 일하고 인정받고 자유로웠다. 남성조직이었으나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었다. 그리고는 태지 팬덤에서도 몇 번의 전쟁은 치렀지만 ‘말과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이랑 오래 지냈고 프로급 친구들과 일했다. 서로를 성장시킨 좋은 공동체였다.
프리랜서의 세계는 관료조직의 생리와 정반대로 움직이는 곳이다. 빨대로 능력을 뽑아가는 민첩한 시스템이고 구닥다리 절차도 관행도 무례함도 군더더기도 없다. 수유너머는 좀 금욕적이나 공기 좋은 절간처럼 생각을 틔워주는 곳이고. 이래저래 지금까지 좋은 곳에서 일하는 행운을 누린 측면도 있지만, 난 조직의 쓴맛을 단맛으로 바꾸기 위해 투쟁도 많이 했다. 신입사원 때 커피심부름에 저항하고 성평등 문화를 구축한 것부터 불순한 관행들에 대해 저항의 연속이었다. 좋은 환경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그럴 수 없으면 좋은 환경 찾아 떠났다.
둘째 후회의 눈물. “후회스럽지 않겠어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산을 다 넘었고 이제 하기만 하면 되는데 지금 그만두면 아깝다며 재차 묻는다. 시작하면 어떻게든 된다고 일단 하라고 설득했지만 난 그런 방식으로 일해본 적도 없고 그렇게하느니 욕먹고 안한다고 잘라 말했다. 이틀 후 마음이 바뀐 건 아니냐고 문자가 왔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으므로 후회 없다고 내 능력의 한계가 여기까지 같다고 미안하고 건강하시라고 답변을 보냈다. 상황이 다 종료되고 나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자꾸 귓전을 울린다.
글쎄다. 나중에? 후회?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 그 표현이 한 없이 낯설었다. 영화 <아저씨>버전으로 “나는 오늘을 산다.” 원래 없는 사람들은 오늘을 살 수밖에 없다. 후회 할 시간도 없었고 방법도 모른다. 내 것이 아닌 건 일찌감치 포기 해버려서 그런지 모른다. 인생에서 그냥 벌어지는 일은 없으므로 후회할 일도 없다. 나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 욕망과 능력을 확실히 알았다. 이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도 다시금 깨달았다. 인생 날로 먹으려 하지 말라는 것은 액자 표구해 두어야할 교훈이다. 당분간 아쉬움, 야속함, 미안함을 안고서 지내야할 것같다. 그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고 일상의 균형을 잡아가는 수밖에 없다. 오늘의 행함 속에 과거는 재구성되기 마련이므로 나중에 후회한단 말은 어불성설이다. 후회보단 반성. 반성보단 행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