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오르는말들

미안한 충고


우연이다. 어느 단체의 기념행사에 갔다가 아는 선배랑 상봉했다. 거의 4년 만에 보는 얼굴. 반가웠다. 내가 다음 행선지가 있어서 헐거운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 날인가 전화로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떨었다. 선배가 물었다. ‘나 많이 늙었지?’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꼭 저렇게 물어본다. 식상한 대사가 웃겨서 ‘응’ 그랬다. 그리고 며칠 전에 인터뷰를 갔다가 다시 우연히, 마주쳤다. 깜짝 놀랐다. 두 번의 우연을 기념하여 일을 마치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더라. 재물운이 넘쳐 자랑거리가 많은 사모님 동창의 재회라면 모를까, 없는 자들의 사는 얘기는 사는 게 힘든 얘기로 흐르기 마련이다. 또 삶의 골치 아픈 문제는 대부분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냥 관계가 아니라 끊을 수 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관계. 가족이라는 강력한 굴레와 불편한 지인까지, 하나같이 대상도 폭넓고 사연도 복잡하다. 선배도 그랬다. 가족은 영구책임의 대상이고,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청탁과 들이미는 얼굴, 수행해야할 일은 일과를 엉키게 만든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다가 정작 본인이 상처를 받고 자신의 상처를 감염시킨다. 한마디로 애증의 인연의 연쇄를 끊어내지 못했다. 

사실 “가족 탈출”에 관한 고민은 나도 남부럽지 않게 해본 거 같다. 그런데 부부관계는 몰라도 혈육관계는 해체와 재구성으로 결판내기가 불가능한 질곡이다. 봉합하고 인내하면서 '오늘도 무사히'를 바라다 보면 어느 순간 '숨 쉴 만한' 국면에 가있기도 한다. 이런 나의 경험이 경청을 방해한다. 그냥 말하고 싶어진다. ‘별 방법이 없어. 안고 가야지.’  하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상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는 대로 살지 못해 힘든 게 인생이니까. 
(인터뷰할 때처럼 조용히 그리고 성실히 고민을 가슴에 받아적을 것)


누군가 고민을 터놓았을 때 “있잖아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이렇고 쟤는 저렇고 당신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아. 그래도 다 참고 살잖아”라고 상대의 처지를 ‘고통-일반’으로 동일화시켜버리는 태도가 가장 나쁜 것 같다. 듣는 사람 무안하다. 은근히 폭력적인 논리가 깔렸다. 정해진대로 살아야한다는데 어떤 말을 더 하겠는가. 그러니 경험치가 많다고 다 지혜로워지지 않는다. 꼰대가 되기도 그만큼 쉽다. 거두절미하고 ‘해봐서 안다’는 믿음은 어리석은 삶의 함정이다. 순간순간 얼마나 많은 우연이 개입하는가. 가장 윤리적인 태도는 바보처럼 들어주기. 힘들었겠다며 다독다독 인정해주기. 아이 키우는 육아서에 단골로 나오는 지침인데, 인연을 키우는 어른도 가슴에 새겨야할 말 같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에게 뭐라고 떠들었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큰 맥락에서 릴케의 충고를 인용했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들다면, 성급하게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것. 지금까지 답을 갖고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해도 그 해답이 주어지지는 않는 다는 것. 문제속에서 살아감으로써만 아주 나중에 답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잘 알려진 얘기였다. 아무리 좋은 말도 내 것이 되기 전엔 식상하고 진부하거늘. 지나고 나니, 황지우 말대로 오늘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왜 인가. 허허롭다. 그동안 타인의 절망을 듣고 거기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에 나는 얼마만큼 성실했는가. 그 생각을 하면 우주가 온통 미안해진다.

위클리 수유너머에서 친구가 번역하는 <다가오는 봉기>를 읽다가  가족과 자유에 대한 좋은 글귀를 발견했다. 릴케의 말과 내용적으로 유사하다. 둘다 일단 살아볼 것을 촉구하는데 이 글이 더 팔딱인다. 삶에 대한 권력의지를 북돋운다.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구체적이다. 아, 책은 얼마나 위대한가. 책이 내게 그러하듯, 나도 책처럼 친구에게 '밑줄 긋고 싶은' 삶의 조언을 조곤조곤 들려주고 싶다.

자유란 얽매임에서 풀려난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얽매임에 대해 행동하고, 움직이고, 그것을 세우거나 끊어버릴 수 있는 실천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은,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바꾸기를 포기했거나 그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만, 가족으로 그러니까 하나의 지옥으로 존재하게된다. 그냥 포기하고 떠나버릴 자유, 항상 그것이 자유에 대한 환영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구속하는 것을 그냥 치워버리는 것은 우리 힘이 행할 수도 있었을 일을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차오르는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수레의 '의미와 무의미'  (10) 2010.09.18
인터뷰 현장스케치  (10) 2010.09.14
엄마와 수박  (6) 2010.08.14
꽃수레의 설계노트  (16) 2010.06.21
위클리수유너머, 웹꼬뮨의 길  (7) 2010.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