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 그 삶 / 채호기 '격렬하고 불투명한 삶'

 

어느 날 내 몸은 잘게 부서져 눈이 되어 흩날리니

이리저리 몰리며 몸부림치는 나의 영혼 눈보라로 흩어지네.

살점 몇 개는 사람들 신발 밑에 깔려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딴 세상으로 가버렸으니

내 삶의 어떤 부분이 질펀히 녹아 하수구로 흘러 버려지는가.

살점 몇 개는 벌거벗은 너의 눈 속으로 흘러들어

두근거리는 피가 되어 너의 몸속을 떠돌며

네 예민한 감각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니

너의 삶도 상심의 회오리에 실려

찬 계곡을 눈보라처럼 부유하네.

그토록 단정하던 너의 몸, 뚜렷한 색깔과 형태의 너의 몸이

흐트러지며 단단히 잡고 있던 마지막 흰 숨결까지 게워내며

눈보라 속에 천천히 지워져가고

너의 몸과 너의 삶이 선명한 푸른색으로 남아 있던

그 자리

내 몸과 네 삶이 뿌옇게 섞이고 있는 거기 그 자리

서리 낀 창의 잘 보이지 않는 저쪽처럼

삶과 삶이 섞이는 답답하고 느린

끝없이 유예되는 그 자리, 격렬하고 불투명한 그 삶.

 

 - 채호기 시집 <슬픈게이> 문학과지성사 

요즘 펜이 무겁다. 천근 같이 안 움직인다. 물론 펜으로 글을 쓰지 않지만. 글을 쓰기가 망설여지고 조심스럽다. 미친 듯이 써댈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써야하는가’ 묻기 전에 그냥 쓰고 있었다. 지금은 글과 나 사이에 뭔가 개입된 기분이다. 일종의 결제라인 같은.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도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쉽게 쓴다는 것은 그만큼 익숙한 사유의 틀 안에서 글이 생산된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 신중하게 쓰겠다고 해서 심오한 사상이 나오진 않는다. 그래도 함부로 쓰면 안 될 것 같은 강력한 내적 요청이 있다. 왜 일까. 일단은 내 느낌에 집중하고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인터뷰를 하고 오면 그날 밤에 바로 쓰거나 적어도 이틀을 넘기지 않았는데, 요즘은 일주일 안에 쓰는 일이 잦다. 지금 쓰는 원고 하나도 오늘이 6일째인데 겨우 초고를 썼다. 영원히 못 쓰는 줄 알았는데 이 무더위에 쓰긴 썼다.  

예전 같으면 환장하고 나갔을 인터뷰 요청을 계속 마다하고 있다. 좀 아쉽지만, 그렇다고 확 끌리지도 않았다. 내가 결심해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면서 결심이 굳어간다. 만나는 사람이, 그에 반응하는 감각이 바뀌지 않으면 내 신체도 글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쉬는 중이다. 괴로운 건 원고료. 아쉬운 게 아니라 괴롭다. 저번 주에는 통장에 4만 원 가량이 남아있었다. 살면서 통장에 돈이 이렇게 바닥나 본적이 거의 없어서 놀랐고 나의 자발적 백수체제가 시작됐음이 실감났다. ‘가난’을 직면해야 한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구체적인 것은 없지만 로자룩셈부르크 말대로 ‘과거를 연장할 것인가, 미래를 시작할 것인가’의 물음을 던져놓고 보면 난 미래를 시작하고 싶을 뿐이다.  

어제는 장애인 관련 공부를 했다. 소수성에 대해 웬만큼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또 고개가 숙여졌다. 이렇게 공부는 세상을 알아가는 게 아니라 나를 알아가는 일이다. 모든 문제가 나에게로 귀결된다. 세상에 나와 관련 없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공부 같다. 나의 삶과 타자의 삶이 섞이는 시기. 끝없이 유예되는 그 불투명한 시간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