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 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 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 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 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 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 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 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워크맨은 귓속에 몇천 년의 갠지즈를 감고 돌리고 창틈 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 냄새가 올라 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 냄새가 도시 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여관의 말뚝에 매인 산양은 왜 밤새 우는 것일까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 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 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
일주일 뒤 멀리 떠나는 친구와 이별주를 마셨다. 그동안 너무도 억압된 채 억척스럽게 살아왔다고, 이제는 에너지 뻗치는 대로 한 번 살아보고 싶단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한갓된 도덕 감정에 결박당한 채 착실하게 살았다는 것의 뼈아픈 자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척도에 충실하게 목표를 추구하면서 살았고 원하던 것을 이루었지만 뒤따라온 존재물음에 미아가 됐노라고 했다. 한 생 쭈그리고 앉아 떠는 방랑. 이젠 오금 펴고 잘 살다 오라고 잔을 부딪고 손을 잡고 안아서 등 토닥여주었다.
사람살이만큼 슬픈 게 없다. 내게는. 사는 일의 고단함이 자동으로 시뮬레이션 돼서 그렇다. 사랑하지 않는 이유. 단 한 번의 사랑했던 이야기. 사랑하면서 지독히도 외로웠노라고 할 때 같이 몸서리가 쳐졌다. 외로움의 표정을 따라했다. 테이블에 놓인 화장실용 그 두루마리 휴지따라 '묶어놓은 것'이 둘둘 풀렸다. 그가 말한다. 어쩌면 한 남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눈 먼 장님처럼 무모하게 사랑했던 본래 자기를 사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숭고한 몰아의 경험. 사랑심의 기억을 파먹으며 평생을 산다는 사실, 많은 인간이 그렇게 그리움의 우물 파서 기다림의 목을 축이며 연명한다.
생의 어느 한 시절,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서로의 소용이 닿기 때문이다. 괜히 잘 해주고 싶은 사람, 괜히 끌리는 사람, 괜히 맴돌게 되는 사람. 괜히 떠나고 싶은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 뭔가 주고받을 마음의 거래가 있는 것이다. 그 대가를 누구는 혹독하게도 치르고 어떤 이는 수월하게 치른다. 생은 원래 불공평하니까. 수두처럼 통증과 상처의 깊이가 저마다 다르다. 주어진 임무를 마치면 떠난다. 스르르. 주문이 풀리듯이 삶에서 떨어져 나간다. 봄비에 목련지듯. 시절인연이 다한 것이다. 내가 떠난 사람, 나를 떠난 사람을 생각한다. 잠시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