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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일기

2020.9.21

1. 팡팡 작가의 우한일기 추천사를 썼다. 500쪽 가량 되는 원고를 다 읽었다. 어제 몸이 아픈데도 그 무거운 거 들고 카페 가서도 봤다. 매일 기록하는 것, 비상사태에서 상황을 읽어내는 일의 중요성을 배웠다. 재난의 시대를 통과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저 기록만을 남길 뿐이다."라고 말한다. 작가는 쓰는 일을 하고, 배달노동자는 배달을 하고, 청소노동자는 청소를 한다. 각자 자기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로 일상이 세계가 굴러간다는 자명한 진실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중요한 기록을 우한에서 60년을 산 작가가, 도시에 대한 애정으로 보고 듣고 썼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우한은 코로나의 발원지라는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팡팡이라는 작가를 준비한 행운도 있는 도시다. 큰 일은 여자가 해야지, 언제부턴가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말인데 그말을 쓴 뒤로 큰 일 하는 여자들만 보이고 그들이 내 삶을 에워싸는 느낌이다. 말의 주술성. 

2. 주말에 비진학청년들, 대안학교 교사들로 이뤄진 모임에서 나를 초대해서 다녀왔다. 대학을 가지 않고 취업을 하지 않는 청년들이 갈만한 곳, 할만한 일이 없다. 취업을 해도 돈버는 수단으로 삶이 잠식돼 버리는 게 문제다. 사람이란 무릇 다른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고 자극받고 다른 삶을 기웃거리면서 웃고 울고 느끼고 그렇게 영혼을 단련시키며 살아야하는 존재이거늘, 그럴 기회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글쓰기 수업에 오는 대안학교 졸업한 청년들도 늘 호소하는 불편함이었다. 지난여름 전주의 고등학교 토론대회에 온 한 청소년도 말했다. 자기는 대학에 들어갈 뜻이 없는데 그럼 어디서 사람들을 만나서 토론도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나는 주변의 작은 책방에서 하는 독서모임을 가던가,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는 것을 권했다. 나는 좋은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 돈 아닌 것에도 가치를 두는 사람이 주변에 많을수록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주의다. 대학 아닌 청년, 성인을 위한 배움공동체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답은 모르겠지만 질문을 놓지 않고 말하고 떠들어 봐야지. 

3. 2020년 9월 21일 온라인으로 글쓰기수업 강의 첫날이다. 글쓰기 수업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므로, 기록하고 싶다. 우려와 걱정이 많았다. 눈 마주치고 손 만지고 침 튀기고 대화해야 토론이 가능하다고, 스크린이란 장벽 없이 만나는 수업을 원본으로 놓고 생각했어서다. 아쉬운대로 차선책 느낌이었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하니까 밀도가 높아지는 부분이 있다. 각 개인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지고, 얼굴이 동등하게 배분되어 집중력이 좋다. 무엇보다 속초, 제주, 대구, 원주 등 지역에 계신 분들, 그리고 품에 아이를 안고 있는 분들이 참여할 수 있어서 좋다. 서울중심성을 벗어나는 꽤 강력한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온라인 기반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생기면서 누구나 글 쓸 기회가 많아졌듯이, 온라인 줌 방식으로 수업의 기반이 확장되면서 또다른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생각해보면 나도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 공동체 없는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하이텔-인터넷 커뮤니티 기반으로 사회적 자아의 끈을 놓치지 않고 읽고 쓰고 쓴 글을 읽어주는 소박하나마 독자를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은 연결되어야하는 존재고 사회적 자원이 없는 사람은 더 연결의 장에 들어오는 게 어렵지만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4. 요며칠 암 투병 중인 친구들 때문에 매일 눈물바람이다. 며칠 전엔 친구1 때문에 아침 댓바람부터 통화하다 울고 그 하루 뒤엔 친구2랑 밤에 통화하다가 펑펑울었다. 어제 수업 전에 친구3의 아내의 전화를 받고 통곡했다. 너무 슬프고, 미치겠다. 마음의 괴로움이 지나쳤나. 어제 수업에서 자기소개 때 한 분이 '유방암 걸린 걸 작년에 알았고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글쓰기다'라고 하는 말에 '유방암 치료는 어느 정도 받으신 건지' 내가 물어봤고 그 분이 말하고 싶지 않다고 부드럽게 이야기해주셨다. 그때서야 내가 실수했음을 알았다. 곤란한 질문, 무례한 얘기였다. 나중에 사과드렸다. 불편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하는데 대답하고 싶지 않을 때 대답을 거부하는 것, 잘못을 알았을 때 잘 사과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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